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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진 Aug 27. 2022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있는 수의사가 되기를 바라며.

21.3.11의 기록

젖소목장 집의 '딸'

강아지와 고양이와 함께 살고 있는 반려동물들의 '보호자'

수의대를 다니는 '학생'

야생동물구조센터의 '근무자'


위의 동물과 관련된 나를 지칭하는 호칭 중에는 내가 아무런 노력 없이, 그저 태어났기 때문에 얻게 된 호칭도 있으며, 스스로 찾아보고 공부하고 지원함으로써 얻게 된 호칭도 있다. 내가 처음으로 수의사라는 꿈을 가진 후 처음 활동을 시작하며(아마 동물 관련 책을 읽었나) 품게 된 생각은 "생명의 경중을 두지 않고 평등하게 모든 동물을 대하는 수의사가 되길."이었다. 그리고 이건 생각보다 너무 어렵다는 것을 몸으로 경험하고 있다.


나는 지금 반려동물, 산업동물, 야생동물을 대하는 일을 하고 있으며, 아직은 아니지만, 아마 내년부터는 실험동물까지 하여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동물들의 형태를 대부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난 반려동물의 입맛 고착화를 방지하기 위해 다양한 해산물, 육류 등을 사용하고 있고, 낙농업을 하는 집안 어른들을 도와 소들은 착유실로 밀어 넣으며 평생 동안 임신/출산과 착유를 하는 모습만을 보고 있다. 또한, 야생동물구조센터에 들어온 다양한 동물들을 살리기 위해 옆에서 도왔으며, 그를 위해 각각의 동물들의 식습관에 맞춰 병아리, 메추리, 마우스, 물고기들을 잘게 잘라 먹이를 준비한다.


나는 내 이익을 위해, 혹은 내가 대하는 동물을 존중하기 위해 동물을 소비하고 있다.


내가 애정을 갖고, 애틋함을 갖고 있는 수의사라는 직업에 대해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자꾸만 눈물이 떨어지는 이유는 아마 이것에 있지 않을까 예측해본다. 이러한 딜레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나는 내가 수의사를 할 만큼 담대하지는 못하다고 생각한다. 수의대 면접을 보러 가는 기차 안에서 구조센터의 선생님과 통화를 하며 내가 합격하더라도 감히 동물을 대하는 일을 해도 되겠냐고 소리 죽여 울며 내뱉은 말들은 수의대에 합격한 지금도 여전히 갖고 있는 생각이다. 코로나로 인해 비대면으로 본가에서 소를 모는 일을 도왔던 작년은 내 손으로 동물의 복지라고는 전혀 고려되지 않는 우리 집의 현실에 마주해 거의 우울증을 겪었으며, 구조센터의 계류 중인 동물들의 먹이를 준비하며 가위로 쪼갠 쥐와 병아리의 눈과 자꾸 내가 살리려 노력하는 동물들의 눈이 내가 잠들기 위해 눈을 감을 때마다 어둠 속에 보이는듯하여 쉬이 잠들지 못하는 밤을 겪었다.


이렇게 그럼에도 내가 수의사라는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길이 내 눈에 밟히기 때문이다. 한상태 작가님의 <고기로 태어나서>란 책의


"이런저런 윤리나 논리에 대해 고민하는 이유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잔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야기하는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가 아닌가?"


라는 말처럼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내가 야기하는 고통을 최소화하고 싶다. 동물들이 그 동물들이 있는 자리에서 최소한의 고통을 받고, 최대한의 행복을 누리도록 해주고 싶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대로 두는 것이 순리라며, 고통스러우면 고통스러운 대로 두는 짓은 그로 인해 생기는 죄책감이 나를 아주 오랫동안이나 괴롭힐 것 같다.

모두에게 내가 옳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여전히 모순적인 사람이며, 동물의 입장에서 생각하기보다는 사람으로서 사고한다. 하지만, 이런 나라도, 수의사가 된 후에 내 선택이 모두 옳지 않더라도,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한다면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있는 수의사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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