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승자박에 갇힌 꼴이란
A 씨는 잠들기 전, 밤마다 오늘은 무슨 일을 했고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매일 기록한다. 어쩌다 한 번 하루를 거를 수는 있으나, 다음 날 이틀 치를 쓰기 때문에 무리는 없다. 혹시라도 여행이라도 가게 된다면, 여행 갈 때 쓰는 다이어리를 따로 챙기거나 혹은 일주일치를 왕창 몰아서 쓴다. 매번 그렇게 쓰는 것이 귀찮고 번거롭지 않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너털거리는 웃음으로 대답하지만 이미 습관이 되어 그렇게 힘든 건 아니라고 답문 한다. '다음 날 전 날 저녁도 생각 안 나는데, 그날 일은 당일에 기록하는 게 제일 정확해' 그렇다, A 씨는 기록 강박을 갖고 있다.
B 씨는 다른 사람들이 볼 때 마른 편으로, 그 역시 이 사실을 알고 있다. 연예인처럼 마른 건 아니지만,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 날씬하다고 얘기하는 편이다. 그녀는 나름대로 자기만의 몸무게 기준을 갖고 있다. 50kg. 과식하는 날은 종종 50kg를 넘기기도 하나, 곧장 다음 날 샐러드 등을 먹으며 자신이 정한 몸무게의 적정선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가끔 폭식이 연이어 이어지는 날이면, 그깟 몸무게가 뭐라고-라고 생각하지만.
사람들은 각각의 강박을 갖고 있다. 위에 나왔던 A 씨는 기록 강박, B 씨는 마름 강박이다. 요새 아무 단어에나 '강박'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것 같지만, 실제로 개개인에게 공공연하게 일어나는 것이 바로 강박증세가 아닌가 싶다. 이걸 하지 않으면 불안하고, 이걸 지키지 않으면 압박받는다. 이런 강박관념이 스스로를 되려 피곤하게 하는 걸 모르고.
유세 떨듯 위에 얘기했지만, 나 역시 수많은 강박관념을 갖고 있다. 위의 A 씨와 B 씨 얘기는 내가 갖고 있는 강박에서 조금씩 변형한 예시이다. 나 역시 6개월 전만 해도, 기록강박을 갖고 있었으며(브런치와 블로그에 글을 쓰는 것 역시 그 연장선이 아닐까 싶긴 하지만) 몸무게 00kg를 꼭 지켜야 한다는 아니지만, 일정 수치에서 넘어가면 많이 먹었다며 나도 모르게 식단을 조절한다. 건강하게 조절하는 것이라면 상관없으나, 다소 극단적으로 관리하기 때문에 강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위의 강박들은 나를 그리 피곤하게 하지 않는다. 지난달, 우울과 불안을 털어놓듯 쓴 나의 자해일지를 보며 뭐가 그리 슬프고 울컥했는지 혼자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결과적으로, 스스로를 괴롭혔던 것은 바로 '남들과 비교하는 버릇'과 '20대에 무언가를 이뤄야 한다는 강박'이 결정적이었다.
왜 하필 20대일까?
웃기게도.. 20대 후반이 되어서야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바로 요 몇 달 전까지만 해도 20대는 마치 영화의 하이라이트라고 생각했다. 이런 비유는 마치 20대 이후, 즉 30대와 40대는 미끄러지는 거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그런 뜻으로 비유한 건 아니다. 20대에는 많이 방황해도 용서받는 시기, 어떤 좌충우동을 겪어도 20대니까 할 수 있다는 패기, 도전, 용기. 이런 산전수전을 다 겪고 30대에는 칭찬과 박수를 받으며 탄탄대로를 겪는 인생을 살고 싶었다. 즉, 게임으로 따지자면 실드 아이템이 있을 때 있는대로 다 쓰고, 레벨업을 한 다음 고수들만 즐기는 곳에서 편안히 유유자적하며 노는 식이다.
그렇기에 20대 초반에는 남들보다 치열하게 살았다고 자부할 수 있다.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돌아다니고, 하나라도 더해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저 가만히 있는 건 도태되는 거라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그게 역으로 나 스스로를 가둬놓는 꼴이 되어버렸다. 어리석게도 23살 때는 내가 나이를 너무 먹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라고 지레 포기한 일이 제일 후회된다. (23살이 어렸다는 걸 25살 때 깨달았고, 지금은 25살도 어리다는 걸 온몸으로 느낀다.)
그렇게 치열했던 20대 초를 지나, 20대 중반은 암흑기의 시작이었다. 본격적으로 시작된 취준, 취업시장에서 쓸모 있는 구성원이 되기 위해 노력했던 나날들을 지나, 직장인이 되어 눈을 뜨니 벌써 20대 후반이었다. 27세부터(물론 어린 나이지만) 마냥 어린 나이는 아니라는 걸 주변 사람들을 통해 더 여실히 느껴졌다.
직장인이 되어 다짐한 목표를 달성하기에는 쉽지 않았다. 직장인이 되어서야 돈을 모을 수 있었지만, 내가 하고 싶은 건 직장인이 아니여야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나날이 들어오는 월급의 맛을 이미 알아버린 후였고, 퇴사하기 전에 최대한 할 수 있는 걸 다 하자-라고 타협한 지 오래였다. 내가 가진 꿈을 이룬 사람들을 볼 때마다, 특히 그 사람이 나와 동갑이거나 나이가 더 적으면 불안해졌다. 저 사람은 저렇게 앞서 나가고 있는데, 나는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퇴사해? 하지만 차마 퇴사할 용기는 나지 않아 이 의미 없는 에너지 소모만 이어나가는 중이다.
결국 자승자박, 즉 내가 만들어낸 환상과 목표와 다짐으로 인해 나를 망치는 꼴이 되어버렸다. 이미 늦었다고 생각한 패배감이 되려 날 움직이지 않게 만들었고, 하는 건 없으니 다시 또 무력해지는 패배감의 연속이었다. 이런 악순환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 어쩌다 뭐라도 하는 날이면, 잠시 기분은 좋아지지만 이걸 좀 더 일찍 할걸-이라고 후회 가득한 생각이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따금 과거에 머문 생각이 종종 들 때마다 깜짝 놀라기도 한다.
쟤는 20대인데 왜 벌써 유난이야?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안다. 20대가 별거니? 30대 되면 진짜 본격적으로 시작이야!라고 말할 수도 있다. 20대가 인생의 하이라이트가 아님을 이제는 안다. 봄에 피우는 꽃이 있고, 여름에 피우는 꽃이 있고, 가을, 겨울... 각가 다르듯 인생은 20대가 정점이 아니라는 걸. 만들기 나름이란 걸.
그걸 알기에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좀 더 많은 걸 하고 도전하고 싶었고, 다양한 걸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 역시 내 시야의 한계임을 깨달았다. 20대가 아니면 늦었고, 못할 거라는 우물 안 개구리의 생각에서 벗어나 좀 더 오래, 멀리 보는 시야를 가져야겠다. 29살까지 살고 실패했다고 죽는거 아니니까. 어찌 됐든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지는 거니까. 그리고 오래 살 거니까. 패배주의적 태도에서 벗어나, 이제는 이런 한계에서 벗어날 다짐을 해본다. 오늘이 내 인생에서 제일 어리다. 오늘도 하루가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