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번역가 황석희
영화번역가는 영어로 담긴 감독의 의도를 왜곡 없이 우리말 관객에게 전달하려 노력한다. 우리가 헐리우드 영화를 자연스럽게 즐길 수 있는 건 이들이 두 언어 사이에 다리를 충실히 놓아주었기 때문이다. 국내에선 5명 정도만 이름이 알려진 희귀한 직업. 영화 <데드풀>, <스파이더맨>, <보헤미안 랩소디> 등을 번역한 황석희 영화번역가에게 스크린 뒤 번역의 세계에 물었다.
You sent Nick Fury to voicemail..?
Q. <스파이더맨>의 자막을 위트 있게 번역해 많은 사랑을 받았어요. 대표적인 예시가 있을까요?
영화 <스파이더맨 : 파 프롬 홈>에 나오는 대사예요. 피터 파커가 닉 퓨리의 전화를 계속 안 받으니까, ‘닉 퓨리를 보이스 메일(음성사서함)로 넘겼어? 네가 감히 그렇게 할 수 있어?’라고 따지는 상황이죠. 저는 “닉 퓨리 전화를 씹어?”라는 자막으로 옮겼어요.
미국에선 전화를 받지 않고 보이스 메일로 넘겨 녹음하는 일이 거절을 의미해요. 우리는 이런 거절을 ‘전화를 씹는다'라고 표현하잖아요. 이런 문화적인 차이를 감안해 ‘닉 퓨리 전화를 씹어?’라고 자연스럽게 옮겼어요. 번역이 단순한 직역과 다른 것이 이런 지점이죠.
Q. 영화번역가는 국내에 5명 정도만 이름이 알려져 있어요. 어떻게 일을 시작하게 됐나요?
2005년에 문서 번역 아르바이트를 하다 케이블 채널의 다큐멘터리 영상 번역을 시작하게 됐어요. 그때부터 6년 정도 영화 번역을 꿈꿨죠. 한국에 있는 영화 수입사에 한 달에 한 번 꼴로 전화를 하고 이력서를 넣었어요.
그때는 35살 전에 극장에 이름을 한번 올려보는 게 소원이었요. 몇 번도 아니고 딱 한 번. 당시엔 처음 시장에 진입하는 게 하늘의 별따기였거든요. 어쩌다 기회를 얻어도 영화가 흥행하지 않으면 계속 경력을 쌓기 어려웠죠.
우연히 담당 번역가가 자리를 비우면서 대타로 첫 번역을 하게 됐어요. 영화 ‘웜 바디스'였는데 마침 재미있는 영화라서 117만 명의 관객이 봐주셨고 점점 더 큰 기회를 얻을 수 있었어요. 번역 실력이 좋았다기보다는 운이 따라주어서 가능했던 것 같아요.
Q. 진입장벽이 높은 업계의 특성 때문에 ‘영화번역 시장은 남초다’, ‘인맥이 없으면 되기 힘들다’는 인식도 있어요.
번역가 크레딧를 올리지 않는 경우가 많다 보니 알려진 분들이 대부분 남성이긴 해요. 하지만 실제 활동하고 있는 영화번역가는 그보다 훨씬 많고 그중 여성 번역가 비율도 높은 편이에요. 혹시 이런 이유로 망설이고 있다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관계자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는 것은 어떤 시장에서나 중요해요. 하지만 능력이나 실력이 없어도 인맥으로 번역가가 될 수 있다거나, 인맥 없이 영화번역가가 될 수 없다는 건 사실이 아니에요.
영화번역가를 꿈꾼다면
지금이 적기라고 생각해요
Q. 넷플릭스와 같은 OTT 서비스와 함께 영화번역 시장이 커지고 있나요?
넷플릭스를 필두로 디즈니 플러스, 아마존 프라임, HBO맥스 같은 OTT 서비스들이 물밀듯 들어오고 있어요. 영상번역으로 시작해 영화번역을 꿈꾸는 분들이 있다면, 지금이 시장에 들어올 적기라고 생각해요.
일단 넷플릭스 오리지널이나 영화를 번역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 경력을 쌓으면, 극장에서 상영하는 영화번역 시장까지 진입할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거예요. 지금은 중간 에이전시 없이 넷플릭스와 번역가가 직접 연결되거든요. 본인의 적성에 맞고 누가 봐도 인정할 정도라면 괜찮은 수준의 수익을 올리면서 직업을 유지할 수 있을 거예요.
경력이 없는 번역가도 비교적 쉽게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시장이 열린 거죠
Q. 영화번역 뿐만 아니라 번역가가 되는 방법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어요.
두 언어를 오가며 멋진 다리를 놓는 영화 번역가는 참 매력적인 직업이에요. 동시에 정보가 적어 쉽지 않은 직업이기도 해요. 저도 영화번역가라는 꿈을 꾸면서 맨 땅에 헤딩하면서 길을 만들고 정보를 찾았어요.
현직의 시각에서 좀 더 정확한 정보와 가이드를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난 15년 간의 제 경험을 바탕으로 여러분이 맞서 싸울 상대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준비하면 좋겠어요.
Q. 영화번역가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이 길에 도전하는 모든 분을 응원하고 가치 있는 첫걸음을 내딛기를 바랍니다. 저도 어딘가에서 좋은 자막으로 만나뵙기를 기대하고 있을게요.
Creator 황석희
영화번역가로 <데드풀>을 비롯해 <스파이더맨>,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포드 V 페라리>,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등 30편 이상의 영화를 번역했다. 현재 클래스101에서 영화번역 클래스를 진행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