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트래블 소피아 Dec 16. 2023

길을 잃어야 발견할 수 있는 것

 인터넷으로 ‘로마 관광’이나 ‘이탈리아 여행’ 등을 검색어로 입력하면 수많은 추천 여행지가 쏟아져 나온다. 그래서 우리는 ‘로마에서 가볼 만한 곳’이라고 인터넷으로 검색해도 잘 나오지 않는 곳에 가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작정하고 길을 잃어보기로 했다. 

로마 지도를 보면 도심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강이 하나 흐른다. 바로 테베레강인데 이 강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판테온, 포로로마노, 콜로세움 등 유명한 관광지들이 몰려있다. 강 건너 북쪽에 한번 갔다 오긴 했지만 바티칸을 보는데 온종일 걸어 다니느라 너무 피곤해서 그 근처를 잘 보지 못했다. 이 때문에 우리에게 바티칸의 남쪽 지역은 미지의 세계로 남아있었다. 


“저 테베레강 건너엔 뭐가 있을까?”


우리는 콜로세움에 있다가 곧바로 강 쪽으로 가서 다리 하나를 건넜다. 



좁은 골목골목 사이로 온통 작고 귀여운 바, 레스토랑, 커피숍들이 줄줄이 들어서 있었고 골목의 테라스는 맑은 로마의 날씨를 즐기는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골목을 돌면 또 다른 세계가, 다시 골목을 돌아서면 또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어떻게 보면 비슷비슷한 모습이었지만, 골목을 둘러싸고 있는 파스텔 색조의 건물, 가게 인테리어, 간판, 길 모양, 가게를 장식한 꽃들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가게마다 꽉 들어찬 관광객들 표정을 보는 것도 너무 재밌었다. 











이곳의 따스하고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것 같은 분위기가 좋았다. 서울의 아파트 단지들이 생각났다. 회색빛의 아파트 단지. 끝도 없이 획일화된 색채, 모양의 건물을 지나치고 정문을 나서야 겨우 슈퍼에 닿을 수 있는 그런 동네. 인구 밀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집이 하늘 위로 올라가야 하겠지만, 그리고 안전하고 편하게 살 수는 있지만…… 참 재미없다.


우리는 어딘지도 모르고 발걸음 닿는 데로 헤매고 다니다가 젤라토 가게에 앉아 잠시 피곤한 다리를 쉬면서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취미로 열심히 찍던 디지털카메라도 안 가져가서 사진을 잘 찍어봐야겠다는 목적, 콘텐츠를 잘 만들어봐야겠다는 욕심이 없이 풍경을 오롯이 눈에 담았다. 그러니 걷는 내내 마음이 참 편했다.  나는 오랜만에 내가 서 있는 이 공간에, 그리고 윌과 나의 시간에 집중할 수 있었다. 로마에 온 뒤로 누군가 가방을 훔쳐 갈까 봐 잔뜩 경계하고 다녔는데 긴장 가득했던 경계심도 무장 해제되었다. 그저 분위기에 흠뻑 취해서 걸어 다녔다. 도시가 어쩌면 이렇게 로맨틱할 수 있을까? 낭만적이라는 단어 로맨틱(Romantic)은 Roma 로마라는 단어에  접미사 ~스러운 ntic을 붙인 단어로 말 그대로 하자면 ‘로마스러운, 로마다운’이라는 뜻이 된다. 그래서 어쩌면 로마에서 로맨틱함을 느끼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편의점 정도 규모인 작은 마트에 가서 윌은 맥주 한 캔을, 나는 프로세코 작은 것 한 병을 샀다. 프로세코는 이탈리아 북부에서 생산되는 와인으로 내가 좋아하는 스파클링 와인이다. 프랑스에 샴페인이, 스페인에 카바가 있다면 이탈리아에는 프로세코가 있다. 같은 스파클링 와인이지만 버블인 CO2를 만드는 방식에 차이가 있다고 한다. 샴페인은 발효가 이미 끝난 드라이한 베이스 와인들 다시 각각의 병에 넣어 2차 발효를 거치는 전통 방식으로 만들지만, 프로세코는 1차 발효가 끝난 베이스 와인에 효모와 당분을 넣은 후 탱크에서 발효를 하는 샤르마 방식이다. 큰 탱크에서 2차 발효를 하기 때문에 경제적이라 샴페인보다 가격이 저렴한데 나는 샴페인과 맛은 좀 비슷하지만, 저렴한 가격 때문에 캐나다에 살 때 프로세코를 자주 마셨다. 바로 그 프로세코 원산지인 이탈리아에 왔으니 마셔봐야지!


우리는 골목을 한없이 헤매고 다니다가 테베레 강가의 오래되어 보이는 석조 다리 쪽으로 빠져나오게 되었다. 어차피 다리를 건너야 해서 강 쪽으로 간 것인데 그냥 지나쳐 버리기에 다리 주변의 경관이 너무 멋졌다. 그래서 잠시 쉬어 가려고 윌과 다리 밑으로 내려갔다. 강가에 나무로 그늘진 곳에 걸터앉아 다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가지고 온 맥주와 프로세코를 마셨다. 시원한 바람이 코끝을 적시며 지나갔고 한낮의 더위를 식혀 주었다. 한강처럼 넓고 확 트인 강은 아니지만 작은 강이 주는 소박하면서 로맨틱한 낭만이 있었다. 그리고 물가에 있으니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흘러가는 강물도 보고, 지나가는 유람선도 보고, 다리 위로 지나가는 사람들도 보고, 푸른 하늘도 바라보았다. 


폰테 시스토 다리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이곳은 폰테 시스토(Ponte Sisto)라는 다리이고, 우리가 헤매고 다녔던 지역은 트라스테베레라는 동네였다. 나만 몰랐을 뿐, 이곳도 꽤 유명한 관광지였다. 왜 안 그렇겠는가, 로마 도시 전체가 관광지인데……. 하지만 아무 정보 없이 갔다가 어떤 마음의 준비도 없이 맞닥뜨린 아름다운 골목. 난 그때 길을 잃고 천국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다음날엔 숙소에서 느지막하게 일어나 게으름을 피우다 오후 4시쯤 스페인 광장(Siazza di Spagna)을 갔는데 여기서도 길을 잃어보기로 했다. 또 다른 천국을 만나보길 기대하면서. 


스페인 계단이 있는 지하철역에서 내려 골목골목을 누비고 다녔다. 이곳 골목들도 너무 로맨틱했다. 어느 멋진 가게의 테라스에서 스프리츠 한잔과 간단한 스낵을 주문하고 허기진 배를 달랬다. 스프리츠(Spritz)는 프로세코에 탄산수를 섞은 이탈리아 북부지방의 칵테일인데, 무더운 여름날 지치고 목마른 여행자들의 갈증 해소에 탁월한 음료이다.


스페이 계단 맞은편 로마의 거리
스프리츠 칵테일과 스낵


그리고 또 발길 닿는 대로 돌아다니다가  어느새 포폴로 광장(Piazza Popol)에 이르렀다. 포폴로광장 너머로 높은 언덕이 있었고 그 사이로 난 계단이 보이길래 본능적으로 계단을 올랐다. 


포폴로 광장


그리고 또 한 번 기가 막힌 경관을 발견하고야 말았다. 포폴로 광장과 로마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였고 멀리 바티칸의 돔까지 보이는데 태양이 아름다운 도시, 로마를 주홍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우리는 그저 말없이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았다. 


바티칸의 돔과 로마의 전경


 여행하다 보면 길을 잃었을 때 천국을 많이 발견한다. 2016년 여름 윌과 처음으로 라오스로 해외여행을 함께 갔었다. 방비엥이란 도시에 블루라군이 유명하다고 들어 스쿠터를 한 대 빌렸다. 이때 우린 핸드폰 심 카드도 없었고 구글 맵도 없어서 스쿠터 대여해 주신 사장님이 펜으로 종이에다 그려준 부실한 지도를 가지고 길을 나섰는데 블루 라군을 한 번에 찾기에 역부족이었다. 길이 너무 헷갈렸다. ‘여기서 꺾으라고 했나? 여긴가?’ 긴가민가하며 그가 설명해 준 기억을 더듬어 오른쪽으로 꺾었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더 가서 꺾었어야 했다. 잘못 들어선 길에선 두 눈으로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졌다. 탁 트인 언덕 아래 작은 오두막이 하나 있었고 라오스 물소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그리고 멀리 옹기종기 멋진 산들이 보이고 그 앞으로 청록빛 맑은 계곡물이 흘러내렸다. 그곳은 스위밍 라군(swimming lagoon)이라는 곳이었는데 블루 라군만큼 유명하지 않아서 사람들이 없었다. 나중에 블루라군으로 가긴 했지만, 그곳엔 패키지로 온 한국인 관광객이 거의 발 디딜 틈 없이 들어앉아 있었고 대중목욕탕 같은 풍경이 되어버린 블루 라군을 전혀 즐길 수 없었다. 우리는 서로 눈빛을 한 번 주고받은 후 다시 스위밍 라군으로 돌아갔다.



여행이 꼭 이래야 한다는 법도 없고 누구나 본인이 즐기는 여행법이 있겠지만 나는 여행지에 가서 꼭 길을 잃어보길 권유한다. 길을 잃어야만 본인이 절대 기대할 수 없는 경험 할 수 있고 그 감동은 배가 된다. 나는 로마에서 있었던 4일 중에 길을 잃은 날이 가장 좋았다. 물론 숙제하듯 해치워버린 바티칸 투어에서도 많이 배웠고 판테온이나 트레비 분수도 좋았지만 어디가 어딘지도 모른 채 마냥 헤매고 다니다 멋진 곳을 발견한 날들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소도시, 소도시 노래를 부른 나였고 ‘대도시는 별로일 거야.’라고 생각했는데 단지 길을 잃었던 좋은 기억 하나로 고정관념이 산산조각 나 버렸다. 아름다운 그 골목들이, 소박하고 사랑스러운 다리와 강물이, 멋진 언덕에 노을이 ‘나야 나, 로맨틱한 로마!’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그러니 관광지에 갔을 때 단 하루만이라도 검색도 해보지 말고, 지도도 보지 말고 동네를 걸어 다녀 보자! 버스나 기차를 타고 가다가 들어보지도 못한 도시에 내려보자! 


나는 상상만 해도 벌써 즐겁다.   

작가의 이전글 불편한 오벨리스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