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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이 Apr 22. 2021

왜 사기꾼이란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어쩌다 보니 당한 사기

"잘 계시나요?"

안부를 묻는 카톡이 하나 울린다. 중국에서 내 고객이자 소소하게 마음을 나눴던 이웃집 언니 같았던 L의 안부 인사다. L의 남편은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공기업에 다니고 있는데 올 12월 정년퇴직을 앞두고 있다. L은 간단하게 인사만 건네고 본론으로 들어가 퇴직을 앞둔 남편한테 붙은 사기꾼 최박사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최박사는 그녀의 남편이 중국에서 맺게 된 인연이다. 최근에 한국에 사업체를 차려서 퇴직 후 같이 동업을 하자고 제안했는데 암만 살펴봐도 사기꾼 같단다. 문제는 그녀의 남편을 최박사가 어떻게 유혹했는지 똑똑한 배경을 갖고 있는 그녀의 남편이 최박사한테 단단히 빠졌다고 한다. 그녀의 일이 남 같지 않아 주변 인맥을 총동원해 알아보았다. 역시 최박사는 사기꾼이었다.


사기꾼이란 사전적 의미는 습관적으로 남을 속여 이득을 꾀하는 사람을 지칭한다.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거짓말로 다른 사람을 현혹시키고 그 사람에게 간접적으로 어떤 걸 빼앗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직접적으로 훔치는 도둑과 간접적으로 빼앗는 사기꾼 누가 더 나쁘냐에 대해서는 논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다만 사기꾼은 친근함으로 접근한 후 신뢰라는 감정에 뒤통수를 치고 물리적 정신적으로 모두 손해를 끼쳤으니 도둑과 사기꾼 두 가지 인간상을 접한 내가 당해본 바로는 사기꾼에 대한 기억이 더 안 좋다.


어쩌다 외국에 나와 산지 17년이 되었다. 해외에 살면서 교민 사회에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은 <같은 한국 사람을 조심해야 한다>라는 말이다. 서로 돕고 살아야 한다는 교훈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라> 해야 하는 게 인지상정 아니던가. 그런데 같은 민족을 조심하라면서 의심병을 부추기고 있다.

정말 슬프게도 이런 말들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좁은 교민 사회에는 꼭 사기꾼이 출현한다.

해외 거주자들은 한국에 상주하는 사람들에 비해 정보력이 취약하고 사기를 당하더라도 신고 절차가 복잡하기 때문에 그냥 액땜 한셈 치자라며 포기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어떤 때는 신고하기엔 너무 소소한 금액이라 강력 범죄들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더 위중한 접수 서류들에 묻힐게 뻔하다는 지레짐작에 침묵으로 용인하기도 한다.

해외 살이 17년 동안 네 군데의 큰 도시에서 살면서 사기꾼의 행적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않은 적이 없다. 세 곳에선 심지어 내가 직접 사기를 당하거나 사기꾼이 주변에서 맴돌거나 하는 일을 겪은지라 사기꾼이 결코 특별한 누군가가 아닌 그저 평범하게 보이는 '아무나'가 될 수 있다는 진리를 터득하게 되었다. 모르는 누군가를 겪게 될 때 그저 눈에 보이고 마음이 느끼는 대로가 아닌 우선 뇌 한가운데 삐딱이를 장착하고 바라봐야 한다는 현실이 참 서글프다.



사실 사기당한 이야기를 털어놓는 건 나의 어리석음을 증명하는 것 같아 부끄럽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사기꾼과 나는 서로 비껴갈 수 없는 운명 같았고 사기를 당하는 주변 사람들조차도 <저렇게 똑똑한 배경을 가진 사람이 왜?>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은 걸 보면 어쩌다 보니 당한 사기라는 말이 적절할 듯하다.

최근 일간지에서 세계적인 거물로 꼽히는 스티븐 스필버그, 배우 존 말코비치, 노벨평화상 수상자 엘리 비젤, 메이저리그의 전설 샌드 쿠팩스가 어마어마한 금액을 사기당했었다는 기사를 보았다. 물론 내용의 핵심은 그들을 사기 친 피의자의 사망이었지만 내 눈엔 거물들의 이름에 더 집중되는 것이 이들에게 동지애와 함께 사기당한 내 행동에 갑자기 당위성을 인정받는 느낌이었다.

사기를 당할 때는 뭔가 도깨비에 홀린 게 아닐까 싶게 내 몸속으로 어리석은 영혼이 빙의가 됐다 나간 것 같다.


현대에는 사기라는 행동 양식이 자의가 아니라 병에 의한 타의라고 규정짓고 싶은 건지 정신병의 일종으로 치부되는 경우가 있다.

리플리 증후군이나 허언증 같은 증세가 그렇다. 엎어치나 메치나 이들에게 당한 사람은 사기꾼에게 속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정신병이라고 뭔가 그럴싸하게 포장하고 싶겠지만 이들이 한 행동은 영락없는 사기이다.

나 또한 최근에 허언증 환자의 프로급을 맞닥뜨리면서 적은 금액이지만 사기를 당하고는 정신적 허망함에 한동안 맥을 못 추렸다.


말레이시아 교민 대상 소설 창작과정이라는 수강생 모집에 그동안 자아를 돌볼 틈이 없던 중년의 몇 명이 모아졌다. 수강생들은 말레이시아 조호바루, 페낭, 쿠알라룸푸르 등 각 지역에서 모였고 줌을 통해 수업은 진행된다고 했다.

우리를 가르치기로 한 사람은 스스로를 여행 작가라 지칭하며 독일에서 출간 작품을 냈던, 그리고 한국의 유명한 출판사와 이미 출간 계약을 마치고 글을 쓰고 있는 작가라고 했다.

그는 가난한 말레이시아 현지 사람들 집의 무너진 지붕을 고쳐주고, 하수관을 만들어 주고 이런 일을 봉사로 하면서 자신의 에너지를 쏟는 것처럼 교민 카페에 글을 올렸다. 게다가 글 옆에는 나란히 사진까지 올려주는 친절도 베풀었다. 교민들은 본인들은 생각지도 못한 봉사 활동을 하는 작가가 대견스러웠고 응원의 갈채를 보내고 싶어 그의 글들에 수많은 댓글을 남기며 때로는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는 그가 도움을 청하면 기꺼이 선행을 베풀었다.

이런 훌륭한 인품을 가진 이가 작가라고 칭하며 소설 창작과정을 모집한다는 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믿었다.

우리들은 수강료를 내고도 때로는 작가가 급전이 필요하다고 하면 미심쩍은 이유지만 <그깟 푼돈을 사기 치겠어?>라는 마음으로 돈을 보내 주었다.

그의 말을 빌자면 여행 작가라고 소개했던 본인이 어쩌다 코로나 때문에 홍콩에서 떠밀리듯 말레이시아에 정착하게 됐는데 이곳에서 여행을 하다가 태국 경계선 어디쯤에서 강도를 맞았다. 그때 영혼 빼고는 가진 걸 모두 다 털려 수중에 돈 한 푼 없다. 다행히 말레이시아 영사관의 구출 도움을 받아 무사하지만 여전히 돈은 없다. 심지어 그는 이런 내용을 외교부 홈페이지 <칭찬합니다> 게시판에도 올렸으니 ‘누가 정부 사이트에까지 대담하게 거짓글을 올리겠는가’라는 생각들을 했겠는가?


그리고 수업이 흐지부지 진행되다만 두 달 후쯤 미심쩍었던 그의 행각이 거짓이었다는 게 밝혀졌다. 그동안 교민 카페에 썼던 그의 봉사 활동 또한 모두 거짓이었고 사진 또한 구글에서 퍼다 올려놓은 것들이었다. <세상에 이런 잉여 인간도 있구나!> 싶게 그에 대한 놀라운 사기 내역이 여기저기에서 쏟아져 나왔다.

우리보다 앞 선 피해자들이 진작 영사관에 제보를 하고 도움을 요청한 상태였다. 영사관에서 좀 나서 줬더라면 우리의 피해를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앞 선 피해자들이 좀 더 공식적으로 공개를 해줬더라면 어땠을까? 이런 마음은 안 갖기로 했다. 악마가 던진 그물에 잠시 걸려들어 허우적대다 벗어난 비껴갈 수 없는 운명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 안에서 좀 더 정의로운 사람의 주도로 한국에 고소를 해놓은 상태다. 글쓰기가 좋아서 모인 사람들이니 서로 마음 다독이고 독서토론 수업이라도 하자며 한 달에 한 권씩 책을 정해 줌으로 수업도 하고 있다. 수업하는 도중 작가라 지칭했던 사기꾼의 이야기가 양념처럼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좋은 인연으로 남게 된 우리에게 더 집중하자고 했다. 나 또한 소설 창작과정을 계기로 언젠가는 하리라 마음먹었던 글쓰기를 좀 더 빨리 시작하게 되어 새 날을 살고 있다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하지만 그가 중년의 글 쓰고 싶은 순수한 마음을 이용해 사기 친 짓은 암만 생각해도 용서가 안된다. 다만 그를 빌어먹을 인간이라고 욕하진 않기로 했다. 그 사기꾼이 빌어먹는 바람에 사기를 당하는 사람이 또 나오면 안 되니까.



한국에서 이런 이력을 가진 사람이 작가라고 나섰더라면 우린 시작부터 의심을 하고 수업조차 들을 생각을 안 했을 거다. 하지만 외국에서 살면 많은 것들에 목마른 갈증 같은 것들을 느끼게 된다. 특히 문화와 교양 생활을 추구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을 이용한 것들은 더 귀한 것이기에 무조건 믿고 보겠다는 간절함이 더해지는 것 같다.

난 사실 줌으로 소설 창작 수업을 들으면서도 종종 이상한 느낌에 인터넷에서 사기꾼의 특성, 사기꾼의 관상 등 웹 서핑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사기꾼의 계보>에 대해 조사를 했었다. 90퍼센트 이상 의심을 하면서도 ‘설마’ 하는 믿고 싶은 10퍼센트에 더 희망을 걸어보는 쪽으로 매번 마음을 돌렸다.

사기당한 사람들이 상대편을 백 퍼센트 신뢰했는데 당했다는 사람은 없다. 다들 한구석에는 왠지 모를 찜찜한 의심의 본능이 고개를 들면서도 애써 나는 아니겠지라는 마음과 인간에 대해 믿고 싶은 마음이 더 간절한 틈을 이용해 운명은 나를 사기꾼에게 몰아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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