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류이 May 30. 2021

길 위에서 또 다른 길을 찾다

머물러 있는 길과 새로운 길 사이에서 방황하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집 베란다에 서서 밖을 바라보면 양쪽으로 길게 늘어선 단독주택들 사이로 쭉 뻗어있는 길이 보인다. 난 그 길 사이를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지만 그냥 그 길을 바라봄으로 평안을 느낀다. 이제는 어릴 적 동화 같았던 풍경들로 기억되는 율목동 골목길이 눈 앞에 펼쳐진 길과 닮진 않았지만 희한하게 오버랩이 되어 애잔한 추억에 잠기게 된다. 길은 형태가 달라도 다 닮은꼴인 건지.

세상에서 가장 좋아했던 할머니의 거주지가 인천 큰아버지네였던 관계로 난 아주 어린 시절 인천 율목동 골목길을 뻔질나게 뛰어다녔다. 내가 살던 시골엔 앞길 아니면 뒷길이 전부였던 거에 비해 율목동 골목길은 갈래갈래 선택지가 많았다. 이번엔 슈퍼마켓을 이 길로 갔다가 저 길로 돌아왔으면 다음번엔 5분 거리에 있는 삼촌집에 갔다가 일부러 멀찍이 큰길로 나가 10분에 걸쳐서 돌아왔다. 집 사이사이로 난 골목이 여러 개였기에 늘 여러 개의 갈래길에서 잠시 순간 멈췄다가 지루하지 않을 여정의 길을 선택했다.


갈래길을 선택하는 것과 달리 어릴 때는 인생에서 주어진 길은 한 갈래인 줄 알았다. 그냥 이것만이 내 길이니 이 길을 선택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중고등학교를 선택할 때도 동네 아이들이 제일 선호하는 학교로 가는 게 맞다고 생각했고 학교에서도 선생님들이 제시한 길대로 가는 게 옳은 길이려니 생각했다. 그저 어른들이 다루기 쉽게 자라는 게 맞는 길이려니 했다. 내 눈앞에 펼쳐졌던 골목의 길이 그렇게 여러 갈래였는데 왜 내 인생에도 그 수많은 갈래의 골목길처럼 선택지가 많다는 생각을 못하고 살았을까? 아마 어린아이였던 내가 무엇을 선택하는 것에 대한 권한이 그리 많이 주어지지 않아서 그랬을 거라 생각한다. 그 권한이 주어진들 그것을 책임질 능력이 그땐 내게 없다고 생각했었으니까. 그래도 외길뿐이라 믿었던 그 단순했던 순간들이 그립다.


점점 인생을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때가 되면서부터 어릴 때 갈래길을 선택하던 습성이 나오기 시작했다. 평탄하게 정해진 것만 같은 한 길로 못 가고 이 길로도 가고 저 길로도 가는 세상에 펼쳐진 수많은 길을 다 가보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다.

남들이 가서 어찌 되었건 그런 건 개의치 않고 일단 내가 가보고 아니면 다시 되돌아온다는 생각으로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쉰을 앞둔 마흔의 후반부에 들어서서도 한 곳에 정착을 못하고 외국의 이 곳 저곳을 집시 떠돌듯이 떠돌며 산다.

서른 넘어서 남편을 부추겨 중국으로 유학을 갔고 공부가 끝났음에도 귀국하지 않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을 하고 더 좋은 정착지를 찾겠다고 지금의 말레이시아에 와서 살고 있지만 나는 알고 있다. 새 길에 대한 호기심으로 율목동 골목길을 헤매던 그때의 습성을 쉽게 버리지 못할 것임을.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어디에선가
나는 한숨지으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고, 나는
사람들이 적게 간 길을 택했다고
그리고 그것이 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고

로버트 프로스트 <가지 않은 길> 중에서


나에게 인생은 자주 두 갈래의 길을 던져준다. 지금 이 길에 머물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길로 나아가 볼 것인가.

머물러 있던 길은 대부분 평온한 길이다. 그저 그런 비슷한 일상이지만 많이 익숙한 풍경들이 늘 내 곁에서 애쓰고 살지 않아도 된다는 안식의 느낌을 준다.

기웃거리며 새로 가볼까 생각하는 길은 자갈길인지 비단길인지 알 수가 없다. 어쩌면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구처럼 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기로에 서서 깊은 고민을 하지 않는다.

한 번뿐인 인생 뭐 별거 있나. 너무 평탄한 길에서는 설레는 풍경을 찾기가 힘들다.



지난 과거를 되돌아보면 내 인생에 펼쳐졌던 수많았던 길 중에서 선택하지 않아 아쉽게 놓쳐버린 보배 같은 기회들이 많았을 수 있다. 이제는 그 기억들을 되짚어봐도 아련해서 지금 이 모습으로 살고 있는 게 정해진 운명이려니 생각하는 게 편하다.

지금 이 시점에서는 사실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보다 너무 성급하게 새 길 위를 성큼 걷고 나서의 후회했던 순간들이 더 잘 떠오른다.

중국인들은 서로 입성하려고 난리인 상하이에서 미개척지인 먼지 풀풀 난리는 서안을 선택해서 갔던 첫날 밤에도, 초등학교 4학년인 아들을 말레이시아에 두고 비행기를 타고 머나먼 중국으로 일하러 다니면서도 난 왜 사서 고생을 하나 이 길이 진정 내 길이 맞나 의심을 하고 울었더랬다.

미래를 예측할 수도 살아보지도 않았으니 새로운 길 위에 어떤 고난이 펼쳐질지 짐작조차 못하고, 아니 어쩌면 당연한 힘듬을 조금은 예측하고도 그저 신세계에 대한 호기심으로 고난을 옆으로 잠시 밀쳐두고 모른 체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쩌랴! 일은 이미 벌어졌고 난 그 길 위에서 되돌아가는 것보다 그 길을 선택한 것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 더 빠르다는 것을 눈치챘으니 어떻게든 수습을 해야지.

요즘도 여전히 내가 선택한 새로운 길에서 수습을 하느라 바쁘고 정신이 없다.

갑자기 예상치 못하게 터져 나온 코로나 때문에 핸드폰 하나로 중국의 일을 쿠알라룸푸르에서 하려니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3년 전 이 새로운 길을 선택하지 않았더라면 내 마음과 몸이 지금보다는 훨씬 편하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들을 때때로 하면서 살고 있다.



"가본 길보다는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다운 것처럼 내가 놓친 꿈에 비해 현실적으로 획득한 성공이 훨씬 초라해 보이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못 가본 길에 대한 새삼스러운 미련은 노망인가, 집념인가. 올해가 또 경인년이기 때문인가, 5월이란 계절 탓인가, 6월이 또 오고 있기 때문인가. 나는 누구인가? 잠 안 오는 밤, 문득 나를 남처럼 바라보며 물은 적이 있다."

-박완서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중에서-


누구에게나 결핍은 있다.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결핍의 경중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두고두고 아쉬운 길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박완서 작가는 겉으로는 많은 이들의 부러움을 받았던 작가로서의 길을 걸었지만 본인 스스로 뒤안길을 돌아봤을 때 못 가본 길에 대한 회한이 특히나 많았던 것 같다.

인생은 한 번뿐이고 이 펼쳐진 인생 속에서 한 번에 몇 개의 길을 선택하더라도 못 가는 길은 꼭 있기 마련이다.  못 가 본 길은 겪어보지 않았으니 아름다운 안갯속에 싸인 신기루처럼 느껴지는 건 누구에게나 당연한 이치라 하더라도 삶이 꼭 이래야만 하나 하는 서글픔은 든다.
박완서 작가가 여든이 다 되어 안 가본 길에 대한 후회를 했듯이 나는 안 가도 될 길을 선택하고 후회를 하고 있으니 이 세상에 후회 없는 인생이 어디 있을까.

나에게 안 가본 길에 대한 후회는 아마도 그 자리에 남아 보지 않고 새 길을 선택한 것에 대한 후회인 것 같다. 그냥 원래 머물러 있던 길에서 좀 멈춰 서서 그 길에 최선을 다했다 어땠을까.

그랬더라면 이 코로나 때문에 꼼짝도 할 수 없는 시국에 원래 길에 있길 잘했다고 자찬을 했으려나.



원래 있던 길에 머물렀더라면, 그랬더라면......

지금 앉아서 글 쓰는 이 순간 고개만 바로 돌리면 얼굴에 부딪치는 산들바람과 푸릇푸릇한 하늘과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는 낮은 지붕 사이로 뻗어 있는 저 길들이 내 몫이 아니었겠지.

내 마음에 훅 들어오는 이 찰나의 행복감을 누리지는 못했을 거라고 위로한다.

앞으로도 나에게는 계속 같은 형태의 물음을 물을 날이 여러 차례 올 것이다.

지금 머물러 있는 길에서 평안을 찾을 것인지, 길 위에서 또 다른 길을 찾아 떠날 것인지.

평생을 이런 선택의 갈래길에서 헤맬지라도  난 여러 갈래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인생이란게 참 좋다.  










작가의 이전글 왜 사기꾼이란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