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운상가로 향하는 차안에서도 딸은 연신 당부에 또 당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학(영어)를 하려면 워크맨은 기본으로 있어야 한다는 아버지의 생각과 음악을 자동반복으로 듣고야 말겠다는 딸의 이해관계가 일치한 일요일 오후였습니다. 워크맨을 사줘봤자 영어공부따위는 하지 않을 것을 분명히 아셨을테지만, 아버지는 새로 나온 신형전자제품은 꼭 사고 싶어하셨고, 자식들과 손에 들려주고 싶어하셨습니다. 네 남매는 덕분에 친구들에게 뒤지지 않는 1980년대를 보냈었습니다.
전자제품을 파는 수많은 가게를 돌아봅니다. 유리한 흥정이 가능할 것 같은 가게를 찾아야하기 때문이었죠.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흥정에 돌입하지 않고, "네.. 알겠습니다. 돌아보고 오겠습니다."라고 말씀하시고 나왔습니다. 그것이 1단계 서칭이었습니다. 점주들은 "돌아다니셔 봤자에요. 이 이 이상은 없어요."라고 답변하곤 했습니다. 아버지를 병아리처럼 따라다니는 네 남매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특별한 설명이 없으셔도, 사달라고 조르지 않아도, 어떻게 해서건 좋은 물건을 찾아내서 사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나타났습니다. 비록 <금성 아하>는 아니었지만 말이죠. 중소기업이 만든 "오토리버스" 워크맨을 팔고 있는 가게! 아하보다 약간 두껍기는 해도, 모양이 조금 빠지기는해도 아무런 불만이 없습니다. 이어폰만 끼면 본조비가 나타나고 마이클볼튼이 귓가에서 노래를 하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죠.
"4만원!"
아버지는 단호합니다.
"아이구 왜이러세요. 우린 다 굶어죽겠네요." 점원이 죽는시늉을 합니다.
"4만원에 해요."
강경한 말끝에 카드가 있을 것 같은 여운처리의 아버지.
"허허 안되요. 사장님 오시면 저 잘려요. 5만원 주세요. 잘해드릴게요. 다녀보세요. 이 가격이 이 정도면 잘 사시는거에요."
부드러운 말투의 점원. 그러나 꿈적도 하지 않습니다. 접점이 없을 것만 같지요?
"하나만 살 거 아닌데?"
드디어 카드를 빼든 아버지. 살살 구슬리는 말투로 변하기는 했지만 제법 예리하게 던져봅니다. 점원은 아이들을 둘러봅니다. 고등학생 으로보이는 아이 둘, 중학생 아이 둘이라...
"아참... 점잖으신 분이 목줄을 죄시네."
점원은 넉살 좋게 죽는 시늉을 다시 합니다만, 뒤로 한발짝 물러설 준비.
아버지는 여기서 살짝 더 블러핑을 해봅니다.
"영 좀 뭐 하시면 나중에 오겠습니다. 얘들아... "
우리를 돌아보면서 그만 가자는 눈치를 줍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이 집에서 네 개의 카세트를 살 것이라는 것. 아무튼 엉거주춤 일어서는찰라.
"아이쿠... 참.. 너무하시네. 몇 개 사실건데요. 아이들이 다들 똑똑해보이네요."
점원이 다시 빙긋 웃으면서 질문으로 아버지 발목을 잡습니다.
"4만원에 해주는 걸로?"
몇개를 살꺼냐는 질문을 살짝 피해가며 싱긋 웃는 아버지.
험한 세상살이, 생존하기 위해 누구나 터득하는 흥정의 기술이지만 우리에게 아버지는 대단한 협상가인 것 처럼 느껴집니다. 우리는 어릴적부터 사람과 사람이 대면해서 서로 너스레를 떨고, 농을 치고, 설득도하고 제법 날카롭게 들어가고 피하면서 기분좋은 거래를 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 과정에서 좋은 거래를 자주 하게 되면 단골이 되고, 단골은 "덤"이라는 정표를 받게 됩니다.
이제는,
에누리와 다나와 최저가 검색을 하고.
위메프와 11번가에서 리뷰를 보고 카드결재를 합니다.
쿠팡아저씨의 딩동소리와 구매확정 버튼으로 거래는 간단하게 끝납니다.
사라져가는 흥정의 문화. 사람과 사람이 주고받는 어떤 무엇이 쑤욱 빠져버렸는데 아무도 눈치를 못채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허전한 거래. 우리가 응답하라 1988에 눈시울을 붉히는 이유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