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오는 요란한 소리
"가을태풍이죠. 진짜 무서운 것은 가을태풍이에요."
처음 제주에 와서 태풍대비를 할 때, 먼저 와 있던 한결 선생님이 말했다. 여름태풍은 그럭저럭 지나간다고 하면서. 그때까지 태풍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두고 살지 않았었다. 태풍과 수해는 같이다니면서 이재민을 낳았고 나는 성금을 모으는 일에 동참했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태풍은 두려움이 아니라 연민이었다. 그러나 한결 선생님에게 태풍은 다른 의미였다.
2012년 태풍은, 위미를 강타했다. 전까지 위미는 늘 온화한 기후였으므로 해안도로를 따라 콘크리트의 얕으막한 가드를 만들어 놓았었다. 그런데 그해 가을 볼라벤이 그 가드를 때려 부순 것이었다. 어마어마한 밀물이 들이치고, 돌들이 서로 부딪히다 가드가 덩어리째 잘려나갔다. 잘려나간 덩어리는 마음빛그리미 담장을 사정없이 무너뜨렸고 모든 것이 끝났을 때, 뜰은 폐허가 되어 있었다. 마음빛그리미 지붕은 날아가서 천재에 의한 난쏘공이 되었다. 당시 한결 선생님의 황당함이 어떠했겠는가. 집안에 있었는데 갑자기 지붕이 열리더니 하늘에서 폭우가 쏟아졌다고 생각해보라.
읍사무소에 호소를 하고 리사무소에도 호소를 했지만 마음빛그리미는 결국, 한결 선생님 혼자의 힘으로 재건해야했다. 돈이 없으니 건너마을 교동상회 할아버지를 청했고 자신은 데모도를 자처했다. 제주담장은 기술과 노하우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을 바랄 수는 없었으므로 무너진 담장을 올리면서 시멘트로 다짐을 했다. 그해 한결 선생님은 병이났다. 작고 여린 여성에게 돌무더기와 세멘트는 거칠고 힘에 부쳐도 한참 부친 공사였다.
태풍이나 폭풍이 오기 전에 제주는 불안하게 고요하다. 해는 쨍하다. 바람은 없고 습도는 높다. 공기의 밀도가 높아진다. 무거운 공기를 들이마시면 나도 모르게 답답해진다. 차라리 얼른 들이닥치지 그래? 하는 마음이 된다. 그리고 늘 있던 소리가 죽는다. 파도소리도 숨을 낮추고, 바람소리는 물론 없다. 새소리가 정적을 깨듯이 이따금 삐익 하고는 사라진다.
이윽고 고요함은 옅은 회색, 진회색, 먹색 색조로 조금씩 변한다. 프렐류드같은 선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미친년 머리카락 처럼 파도는 시커먼 바위를 때려대고, 흰색포말이 온동네를 뒤덮는다. 이럴 줄 모르고 심긴 식물들은 포말에 초토화 된다. 팽나무, 감귤나무, 집앞 산죽은 한시도 쉬지않고 해드뱅잉을 한다. 후두둑 빗방울이 떨어지면서 태풍은 마치 짐승처럼 부르짖고 천둥번개가 으르렁대면, 우리가 키우는 강아지 잡스는 나무밑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서 또아리를 튼다.
태풍이 오는 날은 제주의 휴일이다. 거리에 사람들이 없다. 강아지도 없다. 배는 당연히 안뜨고, 미리 단도리 한 밭에는 바람만 질주한다. 약속도 없고 일도 없다. 배달도 안한다. 한번은, 폭우가 내리는날 치킨 집에 전화 했었는데, "우리는 비오는날 배달 안합니다." 라고 해서 멋적게 끊은 적이 있다. 날이 궂으면 위미 여성들은 집안일을 하고, 남성들은 술집으로 간다.
태풍이 온다고 하면 마음빛그리미는 제일 먼저 야외전시장 보드판을 떼기 시작한다. 보드 세개를 와이자형식으로 붙여서 부스 하나에 여섯개의 사진이 걸릴 수 있도록 만들었다. 바람에 대비해서 보드를 뗐다 붙였다를 할 수 있게 제작했다. 하나하나 부스를 떼서 바닥에 눕혀놓고 화분이며 물품같은 것들을 담장 아래나 광에 숨겨 놓는다.
이번에도 준비를 했다. 보드를 떼면서 보니 너무 많이 삭아 있었다. 너덜거리고 흔들거리고. 하나하나 떼면서 왠지 섭섭하고 속상한 마음이 든다. 10년이니까 하고 중얼거린다. 시설물이 낡아가는 속도 보다 조금더 부지런해야 되는데 부식되는 속도만큼 오히려 게으르다. 소리없는 찜통같은 날씨에 땀이 비오듯이 쏟아진다. 서글픈 마음으로 잠시 그늘에 앉는다. 마음빛그리미에 쏟았던 많은 사람들의 에너지. 눈물들. 걱정과 한숨, 희망과 기쁨들. 사연들이 땀처럼 흐른다.
제주에서의 가을은 진통같은 태풍을 지나야 맞이할 수 있다. 21년의 가을도 아름다울 것이다. 가을바다 푸른빛은 황홀할 것이고 노을빛은 기막힐 것이며 억새밭은 또 얼마나 감동적일 것인가. 어젯밤 도착하고 새벽엔 떠난 태풍. 지금도 후풍이 만만치 않게 불고 있다. 가을이 저쪽에서 오고 있다. 마음빛의 가을도 아름다웠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