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망을 피한 소망
마음빛그리미 수익사업으로 황금향을 대량구매했다. 추석선물을 타겟으로 팔아볼 요량이었다. 구매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꽤 있어서 화요일에 발송하려고 했는데 태풍이 올라왔다. 모든 선박이 출항을 하지 않는다. 제주는 폭우와 풍랑으로 일기가 심난하고 내 속은 타들어간다.
추석 선물을 누가 추석후에 발송해도 된다고 하겠는가. 인정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런건 예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의가 아니라 취소를 줄줄이 한다. 나같아도 취소할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당연한 환불조치를 진행한다. 그러나 무거워지는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전기세도 어려운데 빚까지 지게 생겼으니 내가 올해 뭘 잘못해서 벌받는건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렇게 완벽하게 폭망할 수는 없고 조금이라도 덜 망해야겠다는 일념에 전화를 돌린다. 제일 만만한 동생들에게, 그리고 친구들에게.
"야, 너 주문한거... 내가 문자 뿌릴께. 추석전 주문받은 상품을 태풍으로 추석후 발송하게되었다 죄송하다. 주문하신 고객님이 너그럽게 양해해주셔서 지금발송하니 죄송하지만 맛있게 드셔달라. 이렇게 뿌릴께. 나 지금 망하게 생겼어. 전기세도 못낸지 석달인데 빚까지 지게 생겼다."
솔직히 "제발....." 이라는 말까지 목에 걸렸다. 그런데 나를 아는 인간들이니까 대부분 도와주었다. "그래라 그러면. 추석 전에 먹으나 추석후에 먹으나 맛은 똑같지 뭐. 근데 너 괜찮냐? 어쩌냐?" 하고 걱정까지 해주었다. 너무 너무 고마웠다. 용기가 나서 생면부지의 고객들에게 전화를 했다. 그러나 나를 모르는 이들은 결국 다들 취소하겠단다. 마음이 다시 무거워진다.
마지막 고객에게 전화를 한다.
"여보세요."
왠지 안심이 되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와 동시에 지난번 레드향도 배송사고가 생겼던 고객이란 기억이 그제야 떠오른다. 이번에 또 이러면 이제 다시는 주문을 안하실텐데.... 하아... 참...
"이차저차해서요. 저.. 추석 전에 받으셔야 하는 것이라면 취소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태풍 때문에요. 죄송합니다."
바다 건너 저편. 경상도 억양이 섞인 차분한 할머니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습니다. 추석 후에 받아도 되니더. 그런데 사장님 어쩝니까? 마이 손해가 나겠네예. 아이고 어쩌면 좋을꼬. 물건이 많이 못나가겠네예. 어옐꼬."
경상도는 곧 죽어도 가호인데. 추석선물을 추석 후에 발송해도 된다고 하는 할머니의 넉넉한 품에 당황한 것은 나였다. 뭔가가 밑에서 으윽하고 올라오고, 위에서는 또 뭔가가 툭하고 떨어지고.... '살아가는 것이 가슴이 시릴 때' 라고 했던가. 시린 가슴이 갑자기 온기를 만나면 이렇게 된다.
할머니는 내가 제주에서 갤러리를 한다는 것도 모른다. 내가 대안학교 교사라는 것도 모른다. 내가 어떤 삶을 사는지 모른다. 몰라도 그냥 아는 것이다. 이것이 대목이고, 대목 한 철 장사를 망치면 그 하반기가 고생스럽다는 것을. 자신이 주문한 상품에 집중하기보다 사고 파는 사람 간의 관계를 보고 있었다. 너르고 따스한 시선이라는 생각에 그렇게 울컥하고 눈물이 떨어진 것이다.
"네, 고객님.." 하고 잠시 정적. 수습하고 다시 말을 잇는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기어코 훌쩍
대부분의 주문은 취소되었지만. 이 할머니 고객이 있었다는 것 만으로도 왠지 힘이 난다. 태풍이 오는 제주 바다도 오늘은 그리 험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이제 힘을 내서 일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