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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어리랏다 Sep 29. 2022

온전한 미움을 받아내는 괴로움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직장 내 관계의 어려움

1. 들어가며


120일 동안 작가님을 못만났어요, 글 쓰는 습관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요, 뭐 이런 비슷한 푸쉬알람을 굳이 꾸역꾸역 받으면서도 브런치에 들어오지 않다가 뜬금없이 노트북을 열어 글을 쓰는 이유는, 도대체 내 감정을 표출할 때가 없기 때문이다. 끝없이 나오는 울분을 토해낸다는 느낌이 아니다. 넘칠듯 말듯, 어찌보면 어느정도 여유로운 공간을 가진 마음의 그릇 안에서 찰랑대는 부정적인 감정의 출렁거림이 가득찬 물의 넘침보다 더 메스껍기 때문에 글을 쓰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내 한 몸 건사하기 위해 일주일의 5일, 출퇴근 시간까지 합쳐 도합 깨어 있는 4/5 정도를 남을 위해 살고 있는 내 인생에서 인간관계의 우울함까지 겹치니 살 맛이 뚝뚝 떨어진다. 결론적으로 나는 한 사람의 온전한 미움을 온 몸으로 받고 있는 중인데 그리 짧지 않은 인생을 살아왔다고 생각함에도 이 경험은 내 마음의 못자국을 남길 것 같다. 더 환장할 노릇은 도저히 이 상황이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것이다. 


일련의 과정을 적어내려 가보며, 지친 내 마음을 달래보고 혹여 이 안에서 뭔가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다는 같지도 않은 긍정적 사고를 되내어 보려 한다. 




2. 관계의 전말


사람을 볼 때, 싸하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는가? 살아가다 보면 몇 마디 대화를 나눠보지 않아도 그런 느낌이 드는 싸한 사람을 정말 이따금씩 만나곤 한다. 나는 내 촉을 굉장히 신뢰하는 편인데, 지금 나를 향해 비수를 꽂는 그 사람 역시 처음 만날 때 나와는 약간 결이 다른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특이하다는 느낌이 아닌, 이상하다는 느낌. 핑퐁 핑퐁 대화가 이루어지는 거싱 아닌 서로 각자 다른 방향을 보고 공을 던지는 신기한 대화의 경험.


그는 선배다. 처음에는 그래도 관계가 그리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나보다 사회경험이 월등히 많았고 커리어도 탄탄해 보였기에 내가 많이 조언을 구했다. 어느샌가 가까워지고 1:1로 술을 먹는 사이로 까지 발전했으니 서로 의지하는 또 한명의 동료가 생겼다고 좋아했다. 하지만 사적인 대화와 공적인 대화의 벽은 생각보다 높았다. 


나는 공과 사를 구분하는 것이 당최 무슨 말인지 아직도 이해를 못하고 있는 사람이다. 감정의 결정체인 사람이, 편견 덩어리인 사람이 어떻게 일은 일대로, 사는 사대로 구분지을 수 있겠는가? 협업이 잘되려면 서로 믿는 신뢰의 관계가 기저에 깔려 있어야 되고 끌어주고 당겨주는 하나의 팀으로써의 상호작용이 동반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정도와 깊이의 선호도 차이는 분명히 존재하겠지만 완전한 공과 사 구분은, 감정을 담으면 안된다는 진리와 같은 말 따위는 아무래도 나에게 별다른 울림을 주지 못한다. 


그는 지나치게 공과 사를 구분하고 의식적으로 자신의 모든 감정을 담아 이것을 굳이 꾸역꾸역 나누려 했다. 어떤 회사를 다니고 싶냐는 질문에 "서로 끈끈하게 이어져 있는 그래도 믿고 즐겁게 일할 수 있는 동료들이 있따는 믿음 안에서 행복하게 다닐 수 있는 회사를 다니고 싶다" 말했을 때, "회사는 동아리가 아니고 일이 되게끔 해야 되는 것 아니냐" 라는 그 말에서 느껴지는 으스스한 기분을 조금 더 집중할 필요가 있었다.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그의 의사소통 방식은 열림을 표방한 내리꽂음이라 정의할 수 있는데 대개 의견을 물어보고 자신이 생각한 그림으로 흘러가지 않으면 계속해서 되묻고 질문하는 형식이다. 이것은요? 저것은요? 이것은 고려해봤나요? 등등 생산적인 피드백이라 볼 수 있으나 그 이후 그에 대한 대책이나 해결방안을 함께 고민하지 않고 계속 되묻기만 하는 그 방식은 사람들을 지쳐 나가떨어지게 만들었다. 개인의 역량과 팀의 역량은 전혀 비례하지 않다는 것을 몸소 느끼며 그가 리딩하는 프로젝트는 결과를 어떻게든 꾸역꾸역 만들어 냈으나 그 안에 있는 팀원들은 결과를 내기 위한 들러리가 된 기분 밖에 못느꼈고 매번 트러블이 한 두개씩은 꼭 있었다.


세세한 중간 과정을 이제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 같고, 본격적인 그의 나에 대한 미움이 시작된 것은 그의 의견에 내가 반기를 표했을 때다. 말끝마다 당신은 연차가 낮고 배워야 하는 입장이기에 피드백을 잘 받아들이는 연습을 해야한다는 그 오만방자한 생각 속에 놀아날 생각이 없었다. 나의 주변 사람에게 내가 한 말을 말해보고 피드백을 들어보라는, 이미 그 대화 속에 내가 잘못되었다는 탄탄히 깔고 시작하는 거만한 쓰레기 같은 말들을 들으며 굳이 참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말했다. 본인도 이 상황에 대해 주변 사람들에게 말해 보고 피드백을 들어보시라고. 대화할 생각이 없으신 분과 이야기 할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내 생에 잊지 못할 경험들은 나의 개인적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가 내 팀장이 되며 시작되었다. 

내가 제안하는 모든 기획들은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멍청한 기획안이 되었다.

내가 전달하는 답변은 항상 오류가 가득한 정확하지 못한 답변이 되었다.

내가 야근하는 이유는 기존에 있던 사람이 나가서 일이 많아 하는 것이 아닌, 업무 효율화를 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이 되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정말 단 한 번도 다른 동료들과 트러블이 없었던 나였기에 처음 겪는 온전한 미움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어떻게든 풀어보려 해도 그 사람은 내가 온전히 자기 손아귀에 들어가지 않는 이상 만족해 하지 못했다. 외부 교육을 나갈 때 이동시간과 중간휴게시간을 실시간으로 보고하라는 것만 보아도 충분히 그의 경직되지 못해 부식된 사고방식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버티고 버티다,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그만두겠다 말했다.



3. 사건의 소강


그만두겠다고 말한 후, 그의 약간은 상기된 표정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충분히 고려하고 말해준 것이라 생각하고 일이 많아 너무 힘들었다는 것을 본인도 알고 있기에 잡지는 않겠다. 위로 보고하겠다는 그의 말이 조롱처럼 느껴졌다. 생각을 재고해보라는 말도, 정확한 퇴사사유가 무엇인지 물어보는 면담도 없었다. 잘 알았고 수리하겠다는 답변. 


내가 회사에 잔류하게 남게 된 것은 더 상위 레벨에서 나의 퇴사사유를 듣고 조직분리를 제안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조직분리를 마지못해 나에게 제안하는 그의 태도가 정말 기상천외해서 지금 나갈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퇴사를 수리하겠다는 그는 위에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태도가 완전히 뒤바뀌어 나를 잡는 태도로 변했다. 나에게 선택지 두 가지를 주었다. 자신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지 않겠는지, 조직분리를 할 것인지. 조직 분리하겠다고 말했다. 팀 내에서 나를 멍청이로 만들고 남들 앞에서 의견을 내리깔고 자신이 협의한 내용을 최종결정단계에서 피드백이라는 이름 하에 뒤집어 쓸모 없게 만드는 그런 사람에게 줄 기회는 없었다. 


조직분리를 하면 남겠다고 의사를 전달한 후, 그의 태도는 가관이었는데 그 사람의 마음그릇이 도대체 얼마나 작은지 가늠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팀이 분리되더라도 협업은 해야 하니, 협업할 때 나에게 바라는 점을 물어보았을 때 자신은 나의 팀리더일 때 충분한 피드백을 주었고 자신이 말한 부분에서 아쉬움이 없다는 같지도 않은 말과 함께 퇴사사유가 본인 때문인 것이라 '프레임'을 만들어 놓고 이제와서 협업을 잘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 지에 대해 말하는 모습에 혼란스럽다는 말을 싸지르는 그 앞에서 나는 내가 퇴사하는 이유는 당신 때문인 것이 맞다고 다시 한 번 이야기했다.



4. 나가며


나는 아직도 그와 함께 일하고 있다. 팀이 분리되고 정말 최소한의 협업을 함에도, 그와의 협업은 항상 흥미진진하다. 불협화음이 항상 끊이지 않고 교묘하게 비꼬는 그 말뽄새는 도저히 어디다 내놔도 손색이 없을 정도인데, 그러한 언사의 습관을 몸에 배게 만든 그의 충실한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


왜 그만두지 않냐고? 그 사람 때문에 나가는 것은 내 마지막 자존심까지 무너지는 것 같기 때문이다. 이 안에서 그와 분리된 인격체로 성공경험을 쌓아가는 내 모습을 내 자신에게 보여주고 싶기 때문이다. 그가 본인의 알량한 자존심 지키려 바둥거리는 꼴을 보며 웃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와 똑같이 대응하는 나를 보며 질려버린다. 신물이 난다. 나도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 치졸하고 길고 긴 싸움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는 그도 알고 나도 알다. 우리는 이 안에서 공생할 수 없고 적당한 거리를 두는 타이밍을 놓쳤기에 한 명이 숙이고 들어오지 않는 이상 앞으로도 계속 이런식으로 갈 확률이 높다. 그 누구도 숙일 생각이 없어 보이니 현재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보는 것이 맞겠다.


직장생활이라는 것에 회한을 느끼고, 회의를 품고, 나도 이렇게 누군가를 미워할 수 있다는 것을 배우고 있는 요즘 그 온전한 미움을 온몸으로 받는 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누구보다 경험하고 있다.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되고, 기쁨을 나누면 배가 된다라는 말이 있다. 헌데, 부정적인 감정은 스스로 마음을 고쳐먹지 않는다면 곰팡이처럼 스스로 계속해서 확장되며 나를 좀먹는다. 


이 글을 처음 쓸 때, 글로 쓰다보면 마음이 좀 풀어질 것을 기대했는데, 쓰면 쓸수록 이전에 느꼈던 온갖 부정적이고 더러운 감정이 밀물처럼 밀고 들어와 오히려 기분이 더 울적해져버렸다. 내가 왜 울적한 지를 잘 보면, 내가 싫어하는 그의 모습이 그를 대응하는 나의 모습 속에도 너무나 잘 녹아져 있기 때문이다. 나도 결국 같은 사람이 되버린 것 같은 무력감에서 나온 울적함이라 할 수 있겠다.


사람과의 관계는, 도저희 정답이 없는 것 같다. 사람관계의 얽힘과 확장이 인생의 전부라고 믿는 나에게 인생은 항상 선택을 강요하고 그 선택이 맞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시험대와 같이 느껴진다. 나는 지금 나에게 맞는 최선의 선택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는 있겠다. 내일 아침 일어나면 다시 그 지긋지긋한 곳으로 출근하여 등을 마주대고 앉아 있겠지만, 이 글을 쓰기 전보다는 초월자의 입장으로 그 관계를 내려볼 수 있는 내가 되었으면 좋겠다.


인공위성에서 보면 나도 먼지고, 뭔가 대단한 일을 하는 것 같은 직장도 먼지일 뿐인 것을. 글을 마무리하며 왜 내가 가진 수많은 관계 중 보잘 것 없는 하나의 관계를 위해 이렇게 불쾌한 감정노동을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고 있는데, 도저히 알 수가 없다. 멈추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내 눈을 들어 남들을 보는 것이 아니라 거울 앞에서서 나를 보아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글을 쓰다보니 더 울적해졌다는 앞선 말은 취소. 

그래도 내 고민이 향후 시간이 지나 뒤돌아 보면 정말 별 일 아닐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나 자신이 온전히 바로 서는 삶. 누군가 온전히 나를 미워하더라도 그 이유를 굳이 찾지 않고 내가 당당한 방향대로 사는 삶. 온전한 미움을 받는 자는 스스로를 믿고 나가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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