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도 잊혀질만큼
7년 만이다.
첫째가 10개월이었을 때 이후로 가뜩이나 오랜만에 방문한 한국이지만, 호주로 이민 온 후 26년간 한 번도 5월의 한국은 보지 못했으니 고국의 봄은 정말 아득한 기억 속에나 있다. 항상 마음이 향하던 것과는 다르게, 이토록 오래 걸린 이유는 꼭 맞는 순간을 위해 아껴두기 위함이었다. 완벽한 시기에, 완벽한 순간들을 보내고 싶어서.
사실 너무 설레는 일이지 않는가. 나는 한국을 항상 좋아했고 그리워했으며, 게다가 각종 꽃들이 만개한 한국의 봄은 상상만으로도 싱그럽고 따스했다. 아이들이 2주간 결석을 하는 것쯤은 대수롭지 않았다. 우리에겐 완벽한 봄이 기다리고 있었기에.
부푼 꿈을 가지고 도착한 한국은 내겐 너무나 익숙한 모습 그대로였다. 떠나온 그대로의 모습. 보이는 많은 것들이 바뀌었지만 보이지 않는 많은 것들이 바뀌지 않은 채였다. 아이들은 사람들이 전부 한국말을 한다며 즐거워했고, 운전석이 왼쪽에 있음에 신기해했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우리는 많은 것들을 보고, 경험하고, 체험하고, 느끼고, 맛보았다. 따스한 햇살과는 대조되는 아직은 차가운 5월의 삼척 바다부터 여주 휴게소의 따끈한 우동. 오픈런, 작전런 해야 하는 키자니아 (직업 체험소)와 본인도 외국인이면서 신기했던 경복궁의 한복 입은 각종 외쿡언니들, 30년 전과 똑같은 추억의 놀이기구 신밧드의 모험까지. 아이들과 함께한 한국은 우리의 오랜 추억이 건재하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줌과 동시에 새로운 '베타'로 업그레이드된 버전을 탑재해 주었다. 누가 봐도 정말 잘 먹고 잘 놀았다 할 수 있는 시간들이었다.
그러나 마음속 깊숙이 자리 잡은 어딘가 꽉 막힌 불편함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기대하던 곳에서 즐거운 경험을 하며 맛있는 음식을 먹는 행복과는 대조되는, 뚜렷하지 않은 불편함이 여행 내내 발목을 붙잡았다. 그것은 일상적인 불편함 과는 거리가 있었다.
(이쯤에서 한번 짚고 가는 일상적인 불편함이라 함은, 신기한 것이기도 했다. 예를 들면..)
1. 수도꼭지의 온수와 냉수의 방향이 반대인 것 ('앗뜨'세례를 몇 번 받았다)
2. 문고리가 왼쪽이 아닌 오른쪽에 달린 것 (은 왼손으로 문을 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 아닌 곳도 있는 것 같았는데, 통일되지 않은 점도 신기했다.
3. 세면대와 변기가 굉장히 낮게 달린 것 (변기에 중심을 잃고 주저앉아 버렸다)
4. 대부분의 화장실이 습식인 것 (매번 슬리퍼 신는 것을 잊어 양말이 젖어버렸다)
5. 대중목욕탕 혹은 샤워실이 개방형인 것 (지유가 질색을 했다)
6. 래시가드에 모자가 달린 것 (대체 왜일까? 아직도 궁금하다)
7. 본인 명의의 휴대전화가 없으면 거의 모든 결제가 불가능하다는 것 (배달음식은 그림의 떡)
8. 롯데월드처럼 외국인이 많이 찾는 곳에 기본적인 안전에 대한 설명이 외국어로 안내되지 않는다는 것
9. 비슷하게 외국인이 많이 찾는 경복궁 내의 화장실에 조차 '화장지를 변기에 넣으면 막힘'이라는 문구가 한글로 밖에 쓰여있지 않은 것 (짧은 안내글이 변기 막힘을 해결하는 것보다 어려운 일인 걸까?)
이런 구체적이고 실체가 있는 불편함은 생활 방식의 차이, 곧 문화적 차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지 못할 것이 없었다. 내가 그만큼 호주의 방식에 익숙해져 있구나, 하는 깨달음의 순간에 불과할 뿐이니까. 살았던 세월보다 떠나지낸 세월이 많으니 당연하게 딸려오는 어색함이랄까.
하지만 나를 당황케 했던 것은 일상적인 편안함을 자연스레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신이었다. 호주의 방식에 익숙해버린 것인지, 나라는 사람이 문화적 짬뽕이 결과물인 것인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나는 호주에서도 - 다른 종류의 - 당황스러운 순간들이 아직 존재하기 때문이다)
20 몇 층 정도 되던 오피스텔 건물에는 총 4대의 엘리베이터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거의 항상 1층에서 문을 열고 대기 중인 상태로 서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잡기 위해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기다리는 것은 내가 아닌 엘리베이터였다. 문화충격의 순간이었다. 편리하지만, 무언가 불편한 대접을 받고 있는 기분이었다. 굳이 파고들자면 편리성과 필요성 사이의 묘한 발란스의 차이가 내 기준과 맞지 않는 기분이었다. 횡단보도 앞에 설치된 그늘막이나, 발밑에도 불이 들어오는 신호등을 보았을 때도, 아이들 하나 없던 평일의 그림책 도서관에 도우미가 여섯 명씩 대기하고 있었을 때도. 또는 매일 새벽 물건들이 배송되곤 하던 수많은 아파트 현관문 앞 풍경 속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가졌다.
누군가의 친절과 희생이 당연하지 않은 사회에 익숙한 나는, 필요에 의한 움직임이 자연스러운 사람이었다. 당연한 친절이란 없고, 필요한 사람이 우물을 파야 하는 호주에서 나는 우물을 파는 것에만 익숙해진 나머지 편리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었나 보다. 되려 편리함의 이면에 숨겨진 누군가의 희생이 먼저 떠오르는 걸 보면 말이다.
처음 호주에 왔을 때 오후 다섯 시만 되면 거리들은 한산해지곤 했다. 슈퍼마켓은 물론 거의 모든 시설들이 그쯤이면 문을 닫고, 저녁 여덟 시쯤 되면 주변 집들에 불이 하나씩 꺼지기 시작했다.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바뀌어온 지금의 호주는 슈퍼마켓이 자정까지 문을 열고, 익일배송도 가능하며, 토요일 오전에도 우체국과 은행이 문을 연다. 배달맨들이 많아졌고, 그에 따른 노동법도 바뀌고 있다. 그렇지만 누군가의 편리해진 삶은 곧 누군가의 팍팍해진 삶이기도 했다. 긴 노동시간, 주말과 주중, 낮과 밤의 경계가 허물어진 사회는 지속적인 노동력을 필요로 하기에, 편리한 삶이 마냥 편안하게만 다가오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나를 기다려주는 엘리베이터를 보고 무슨 생뚱맞은 의식의 흐름이냐 싶지만, 편리함이 익숙한 사회의 부수적은 산물들을 마주할 때마다 자꾸만 그 이면이 떠오르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이것은 호주와 한국의 차이라기보다는 호주에서도 이어온 감정이 증폭된 편이 맞을 것이다.
완벽한 순간이라는 것은 결국 허상에 불과했다. 한국이어서 완벽한 것 혹은 완벽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애초에 내가 바라던 완벽함은 실체 없는 바람이었다. 파랑새를 쫓듯, 무지개의 끝을 따라가듯, 환영이기도 하고 환상이기도 한, 나조차도 알 수 없는 그런 환희의 순간을 가장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이루고픈 헛된 소망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여행이 가치가 있었던 것은, 내면을 한 꺼풀 벗겨 내가 추구하는 삶과 사회의 모습을 다듬어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모든 여행이 그러하듯 이번 역시 긴 여운으로 남을 것임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