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타고니아 다이어리 2017 #10
12월 8일
일기예보처럼 오늘은 어제보다는 날씨가 좋았다. 아침을 먹고 8시 15분에 호스텔을 나왔다. 마을 초입인지라 마을 끝까지 가야 한다. 매일 이 길을 걷고 있다. 삼십 분 만에 트레일 헤드에 도착했다.
피츠로이 봉 Cerro Fitz Roy
피츠로이 봉은 쎄로 찰텐 Cerro Chaltén, 쎄로 피츠 로이 Cerro Fitz Roy, 혹은 Mount Fitz Roy로 불리기도 한다. 이 봉우리에 피츠 로이라는 이름을 붙인 사람은 1877년 아르헨티나 탐험가 프란시스코 모레노로, 피츠 로이는 1834년 산타 크루즈 강을 탐험하고 파타고니아 해안 지역의 지도를 만든 HMS 비아글 Beagle호의 선장의 이름이라고 한다.
마을 이름이기도 하고 옛날 피츠로이 봉의 원래 이름이기도 했던 ‘찰텐’은 이곳에 살던 원주민이 쓰던 말에서 온 것으로 ‘smoking mountain’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쎄로 찰텐은 뜻 그대로 구름에 싸여 있는 때가 더 많기 때문이라고 한다. ‘구름에 싸인’이라는 직관적 멋진 뜻인 찰텐은 마을 이름으로만 남고 봉우리의 이름에는 서구 침략의 첨병 역할을 한 사람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건 참 슬픈 이름이다.
피츠로이 봉은 세계의 미봉 중의 하나이다. 깍이지르듯 솟아있는 이 봉우리는 높이가 3400미터 정도로 높지 않지만, 이 절벽은 암벽 타기로 올라가야 하는 전문 등반가들의 영역인 것 같다. 내가 아는 분 중에 전직 등반가가 한 분 있는데, 에베레스트로 올랐던 분지만, 피츠로이를 등반하기 위해 왔다가 바람이 너무 심해서 날씨가 좋아지기를 기다리다가 결국 등반을 하지 못했다고 했다. 파타고니아의 미친바람은 암벽을 오르는데 악조건으로 작용하는 모양이다. 올라가기 위해서도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보기 위해서도 날씨가 도와주어야 한다.
라구나 데 로스 토레스 Laguna de los Tres 트레킹 21 km
엘 찰텐으로 몰려드는 트레커들은 이 아름다운 피츠로이 봉을 올라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기 위해 트레킹을 한다. 피츠로이 봉을 보기 위해 가는 곳이 라구나 데 로스 토레스 Laguna de los Tres라는 호수이다. 그래서 트레일 이름이 라구나 데 로스 토레스 트레일이지만 보통 피츠로이 트레일로 알려져 있다. 이 트레일은 그 유명세 때문에 사람이 정말 많다.
첫날 갔던 폭포로 가는 길 옆에 트레일 헤드가 있다. 트레일 입구부터 많은 트레커들을 보았고, 그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 동행하게 되었다. 트레일은 잘 다듬어져 있고 거의 경사가 없는 편편한 길이었고, 지루하지 않게 풍경이 계속 바뀌면서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움은 눈 앞에 구름이 싸여 있던 피츠로이 봉우리가 구름이 점점 걷히면서 그 모습을 드러나자 더 환상적이 되었다. 구름에 가려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 그 모습을 볼 수 있어서 기분이 째지게 좋았다.
중간에 카프리 호수로 가는 갈림길이 나왔다. 카프리 호수 근처에도 캠핑장이 있고 카프리 호수로 갔다가 우회할 수 있는 것 같았지만 내려오는 길에 들러보기로 하고 계속 올라갔다. 트레일은 9km 지점쯤에 포인세노트 poincenot 캠핑장을 지나가게 된다. 피츠로이 봉에서 일출을 보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 캠핑장까지 와서 일박을 하고 새벽에 마지막 구간을 올라간다고 한다. 여기서 일박을 하지 않고 일출을 보려면 엘 찰텐에서는 새벽 한두 시에는 출발을 해야 하는 모양이다. 캠핑장에서 캠핑을 하려면 장비도 빌리도 그것을 지고 이곳까지 와야 하고, 아니면 밤 등산은 해야 해서 이번에도 일출 보는 것은 포기했다.
캠핑장을 지나면 오르막이 나타난다. 마지막 마의 구간 일 킬로미터가 굉장히 가파르고 돌길인데 올라가는 사람들까지 많아서 이리저리 피해 올라가다 보니 꽤나 시간이 걸렸다. 호수에 거의 도착했는데 어제 토레 호수에서 처럼 강풍이 불어왔다. 파타고니아의 바람은 어쩌질 못하겠구나 하면서 바람이 떠밀리며 올라가는데 다행히 강풍은 조금 후에 잦아들고 드디어 호수에 도착했다.
돌풍은 잦아져도 바람은 여전히 심하게 불고 있어서 바람을 피해 바위 사이에 숨듯이 앉아 간식을 먹었다. 조그만 여우 한 마리가 나타나 사람들 사이를 어슬렁 거리고 돌아다녔다. 이 녀석도 사람들이 뭔가 던져주기를 기다리는 인간에 길들여진 걸량 뱅이인 모양이었다. 한 시간 가까이 나도 풍경 속의 하나의 사물처럼 앉아 있다가 아쉬운 마음으로 하산을 시작했다.
비탈길에서 한 번 미끄러진 후에 더 천천히 내려왔다. 올라갈 때는 눈 앞에 보면서 올라갔는데 내려올 때는 등 뒤에 두고 오는 마음이 아쉬워 자주 돌아보았다. 올라갈 때 남겨두었던 카프리 호수를 보러 갔다. 캠핑장이 가까워서인지 캠핑하는 사람들이 호수가로 놀러 나와 있었다. 카프리 호수가 데 로스 토레스 호수보다 맑고 예뻤고, 잔잔한 호수는 피츠로이를 거울처럼 품고 있었다. 호수가에서도 한참을 쉬다 내려왔다.
5시에 하산을 마치고 엘 찰텐에 도착했다. 마을 중심가를 터덜터덜 걸어 돌아오는 길에 한 식당에서 들어가 치킨 윙을 시켜서 시원한 맥주를 마셨다. 트레킹을 마치고 먹는 치맥은 최고였다.
바릴로체로 가는 버스는 밤늦게 출발하기 때문에 시간이 좀 남았다. 아침에 체크아웃은 하고 가방을 맡겨 놓고 나왔기 때문에 가방을 찾으러 호스텔에 가서 거기서 시간을 때우기로 했다. 묵었던 방에 올라가 보니 계속 같이 방을 쓰던 소냐가 방에 있었다. 내가 쓰던 침대에는 새로 체크인을 한 사람이 있었다. 두 사람에게 양해를 구하고 샤워를 하고 호스텔 로비에서 놀다가 버스 시간에 맞춰 터미널로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