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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리 Ellie Apr 23. 2021

건강한 자기세계, 오티움을 구축하는 법

관계를 읽는 시간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래서 하늘 바람이
너희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칼릴 지브란

아름다운 칼릴 지브란의 시구절을 보며 이게 답이구나! 싶다가도 상처받을 거리에서 자유롭기보단 외로움을 느끼는 것이 어찌보면 당연한 이치다. "적당한 거리를 둔다"라는 관점으로 관계를 다루는 책들을 최근 많이 접하게 된다.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 없이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있으랴? 이런 책들에 대해 신뢰하지 못하는 이유는 나, 너, 우리의 교집합 속에 무수히 많은 경우의 수가 존재하지만 관계의 문제를 풀어가려면 이러 이러해야 한다는 구체적인 솔루션을 제시하는 책들이 널리고 널려서 인 것 같다.


그래서일까? 인간관계를 다룬 비슷하면서도 다른 관점의 다양한 책들을 접하다 보면 나와의 접점이 꽤 많다. 재미로 사주를 보러 점쟁이를 찾아 나섰는데 A라는 사람이 하는 말도 내 이야기 같고 B라는 사람이 콕 집어 들려주는 이야기도 맞는 말 같은 것과 비슷하다.


살면서 내가 맺어온 인간관계는 나만 벽을 치고 있는 관계도 존재할 테고, 순진한 마음으로 과한 배려와 헌신을 보여줬던 적도 있다. 과도한 상대방의 배려와 관심이 부담스러워서 거리를 둔다거나 내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이도 저도 아닌 관계에 실망했던 경험까지 각양 각색의 다양한 관계들이 공존한다.


너와 나의 교집합이 만나 우리가 될 때 정해져 있는 답이 없으니 이다지도 어렵고 늘 고민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인간관계이다.


애착의 손상과 연결의 회복

인간관계의 잘못된 패턴을 답습하는 원인으로 이 책 또한 이미 지나버린 유년기 애착 문제를 다루고 있다. '안정적 애착이란 애착 손상을 주지 않는 것'은 오해라고 말이다.


아이가 밤늦게까지 자지 않고 칭얼 거려 "야! 너 정말 안 잘 거야?"라고 큰 소리를 지른 후 미안해!라며 섣불리 사과를 한다거나 "엄마도 지쳐서 빨리 쉬고 싶을 때가 있어"라며 화난 이유를 먼저 이해시키는 것은 안정 애착 형성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애착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을 알아서 해주는 부모가 아니라 아이의 마음을 궁금해하고 물어봐 주는 부모다. 뒤늦게라도 아이의 좌절된 욕구와 위로받지 못한 감정을 공감해 주는 대화가 이루어진다면 아이의 애착 손상은 충분히 회복된다. 비록 이런 경험이 열에 한 두 번 정도라고 할지라도 아이에게 관계의 좌절이 영구적 좌절이 아닌 일시적 좌절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에게는 '적절한 애착 손상'이 필요하다. 애착 손상이 전혀 없는 것은 애착 손상이 심각한 것만큼 문제가 될 수 있다. '적절한 애착 욕구의 좌절'은 세상을 헤쳐나갈 독립심을 주고, 자아중심성에서 벗어나 상호적인 관계를 맺어갈 기초가 되고 대상의 좋은 면과 안 좋은 면을 바라보고 통합할 수 있는 시야를 준다. 좌절은 발달의 중요한 요소다. 우리는 안정 애착의 신화에서 벗어나야 한다. 애착은 인생 성공의 보증 수표도 아니다. 부모만큼이나 또래를 비롯한 사회적 관계가 중요하다.

관계를 읽는 시간


아이 - 부모와의 관계에서 안정 애착이란 끝없는 '단절-회복'의 경험으로 만들어지는 동아줄이지, 부모의 초인적 인내와 정성으로 한 번도 금 가지 않고 빚어낸 도자기가 아니다. 그러니 제발 천사 같은 부모가 되려 하지 말고 일시적 단절을 받아들이되 다시 연결을 회복시켜주는 부모가 되라고 조언한다.


하지만 이미 지나버린 유년기를 어떻게 할 것인가? 유년기 잘못된 애착 형성을 들여다보고 이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라는 메시지는 다 큰 성인이 된 누군가에겐 공허하게 들리기도 한다. 연인, 배우자, 나와 가까운 사람들과의 반복되는 잘못된 관계의 패턴은 유년기 회복되지 못한 손상 애착이 무의식적으로 잘못된 관계를 만들어내고 있음을 인지하는 순간 변화가 시작된다.


평범한 성장 과정을 거쳐오면서 애착 손상과 연결 회복을 반복하며 부모와의 관계에서 성인이 된 내가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부분들에 대해 비록 건강하지 못한 방법(?)으로 표현했던 경험이라 할지라도 나를 둘러싼 관계를 재구성하는 데에는 크게 도움이 된다. 이렇게 되기까지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힘들더라도 표현하지 않는 것보다 표현하는 편이 훨씬 낫다!


문화와 바운더리

바운더리(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간 관계를 규정하는'경계'로의 의미) 를 형성하는데 유전자와 애착관계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태어나서 자라나는 사회의 문화도 크게 영향을 끼친다. 동,서양의 문화 차이에서 빚어지는 관념의 차이는 개인의 발달에도 큰 영향을 준다. 문유석 판사님의 <개인주의자 선언>을 읽으면서도 크게 공감했던 부분이다.


동양권에서는 '자아'라는 용어 자체가 낯설다. 심지어 '나'라는 말보다 '우리'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한 외국인이 우리나라의 '우리'라는 화법 사례로 외국인 교수로 한국에 부임했을 당시 한국인 동료가 '우리 남편도 선생님'이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경악했다는 경험담 또한 웃프다. '우리' 남편이라는 말에 옆자리 동료와 함께 결혼한 같은 남편을 두고 있는 사이? 라고 오해를 했다니 말이다.


동양과 같이 인간을 독립된 개인이라기보다는 집단의 구성원으로 보고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사회를 고맥락 사회 'high context society'라고 한다. 서양처럼 인간을 독립된 개인으로 보고 집단과 개인을 구분하는 사회를 저맥락 사회 'low context society'라고 한다.


이런 관념의 차이로 직장, 학교 등 공동체 생활 속에서 자기주장이나 개성을 불편하게 여기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는 고맥락 사회이지만 요즘은 개인주의의 영향을 받아 편차가 매우 다양하다고 할 수 있다.


고맥락으로 대화를 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 저맥락 대화를 했던 내가 맥락의 수위가 달라 답답함을 느끼고 오해를 자아낸 경험이 더러 있다. 눈치가 없고 배려심이 부족한 것처럼 느껴지고 직설적인 화법을 추구한다고 말이다.


건강한 자기 표현을 위해서는 마음을 솔직히 이야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지만 맥락이 다른 상황 속에서는 대상과 상황에 대한 구분이 필요하다.


특히 가깝지 않은 관계에서 감정을 표현하는 대화는 신중해야 한다. 최근 심리학에서는 감정을 중요하게 여기고 감정을 표현하라고 하지만 감정을 나누는 대화에 서툰 우리 문화에서는 이는 쉬운 일이 아니고 역효과도 많이 나타난다.


가깝지 않은 업무 관계라면 내 감정보다는 상황에 대해 솔직하게 표현하는 데 초점을 두어야 한다. 너무 복잡하게 이야기할 필요도 없다. 이를테면 빈둥거리는 동료로 부터 갑자기 부탁받은 업무에 대해 oo라는 할 일이 있고 이 일은 언제까지 해야 한다라는 식으로 구구절절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대개는 할일이 있다거나 시간이 안 된다 정도로도 충분하다.


건강한 자기 세계 만들기 -오티움 Otium

관계의 밸런스가 치우친 사례, 바운더리 유형에 대해 책 속에서는 순응형, 돌봄형, 방어형, 지배형 사 사분면으로 나누어 구분하지만 사분면이 정해져 있다 단정 지어 이야기하지 않으니 다행이다. 인간이 나이를 먹어가면서 지혜로워지는 까닭은 관계 속에서 터득한 경험치와 통찰로 앞으로 다가올 인간 관계 속에서 지혜를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진정한 욕구가 아닌 상대의 욕구대로 행동하는 것과 상대의 욕구대로 행동하지 않으려는 것 둘 다 본질적으로 다를 바가 없다. 발전의 동력이 내적 동기가 아닌 남을 이기려는 강한 경쟁심이라면, 인생의 어느 순간에 자신의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자기 삶 속에 자기가 없다는 허무감에 휩싸이게 된다.


이를 극복하고 나 다움, 건강한 자기 세계를 이루기 위한 4가지 방법을 소개한다. 첫째, 삶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작고 자신의 삶에 스스로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한다. 스스로 결정하고 그 결정이 안 좋은 결과로 이어진다 하더라도 책임질 줄 알고 그 경험에서 무엇 하나라도 배울 수 있다면 말이다.


둘째, 자기이해에서 생겨난 개성을 갖는 것이다. 자기를 모르면 자기 세계를 세울 수 없다. 나답게 산다는 것은 자신의 욕구, 재능, 가치를 아는 것이다. 또한, 자신이 안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의문을 품는 자기비판적 사고를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욕구, 재능, 가치는 인생의 어느 시기에서 완결되는 과제가 결코 아니다. 인간은 평생을 두고 변화하고 성장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재능은 상대적으로 변동성은 적지만 욕구와 가치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셋째, 관심사를 방향성을 갖는 것이다. 자기 이해가 뒤따르면 사소한 관심과 중요한 관심, 내면에 기반을 둔 관심사와 외부에서 기인한 관심사를 구분하고 자신의 삶에서 핵심 관심사를 찾게 된다. '제 1의 관심사'를 찾게 되면 삶의 방향은 저절로 만들어지고 자기 세계는 자연스럽게 구축된다.


마지막으로 스스로 기쁨을 만들어내는 '오티움' Otium 이 필요하다. 건강한 자기 세계를 가진 이들은 지금 행복할 수 있다. 자신의 영혼이 기뻐하는 행위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나는 사회가 주는 인정과 성취가 중요했지만 나이가 들면서 행복과 관계의 안정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내 삶의 가치 기준이 많이 바뀜을 경험하고 있다. 자기 이해는 삶을 살아나가면서 거듭되는 과정이다.


만약 나다운 건강한 관계를 만드는 방법에 대해 알려주는 학문이 있다면 시행 착오를 줄일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자기 이해 학과> 라고 명명하고 싶다. The school of life의 what are univerisites for? - 알랭 드 보통은 우리가 앞으로 대학에서 받아야 하는 교육은 인간의 삶에 기초한 학문이어야 함을 강조한다.


나답게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 불안을 다스리고 공감력을 키우고 실제 삶에 발을 디디고 잘 살아가기 위한 방법들에 대해 말이다.


https://youtu.be/jFCFqjovH3s

지금껏 인생을 살아오면서 오티움-'영혼을 기쁘게 하는 능동적 여가'를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다. 나다움을 찾아가는 과정은 굉장히 여러 가지 면에서 다양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고 뒤늦게 발견될 수도 있기에 가능성을 열어두고 탐색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독서 또한 유관한 업무와 그 밖의 분야에 대해 동등한 비율로 해 나가는 것을 추천한다. 조직에 몸 담고 있던 시절, 업무와 관계없는 독서를 왜 하냐고 반문하던 직장 동료의 말이 떠오른다. 커리어의 연장선 상의 독서가 되어야 한다는 그녀의 말에 도대체 왜 그래야 하는 건데? 라고 마음 속으로 반문하면서도 나와 생각이 다르군하며 애써 반박하지 않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회사를 다니면서도 확고한 바운더리를 지켜내기 위해 많은 에너지를 소진하며 현타가 오는 순간들이 있다. 고백컨데 꽤나 많은 딴짓(?)을 시도하면서 회사 생활을 오래해 나갈 수 있었던 것 같다.


공연 보는 것을 좋아해서 공연 기획 전문가 과정도 수료하고 학위를 취득하기 위한 꿈도 꿨다. 내 자랑을 하는 건 아니지만 여행도 다닐 만큼 원 없이 다녔다. 여행에 대한 기준, 취향 또한 너무 다른 남편과 부딪혀가며 시간을 쪼개어 여행을 다니던 시간들은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 언제인지 깨닫게 된 시간이었다.


마음이 힘들 때면 가까운 서점, 도서관을 들락 날락 하며 책을 읽으면서 내 자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독서는 인정과 성취에 목 말라하는 내게 다양한 관심사를 두루두루 살피고 좋아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시야를 열어줬다. 그런 의미에서 영혼을 기쁘게 하는 능동적 여가를 적극 권장한다.


오티움은 어른의 행복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다. 어른은 관계 뿐 아니라 자기 세계를 통해서도 행복을 느낀다. 오티움은 내일이 아닌 오늘의 행복이며, 물거품같은 쾌락이 아니라 기쁨과 의미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진정한 행복이다. 오티움의 위력은 인간관계에서도 발휘된다. 영혼의 기쁨을 주는 오티움은 점점 깊어진다. 오티움이 깊어지면 자신만의 색깔과 향기를 갖게 되어 주위의 관심을 끈다. 그리고 그 관심사로 인해 새로운 인간관계가 만들어지고 관계가 깊어진다. (중략) 그것은 억지 노력이 아니라 오티움 활동이 주는 자연스러운 변화다. 관계를 위한 관계에 매달리지 않고, 인간관계를 맺고 유지하기 위해 필요 이상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을 때, 서로의 관심사를 공유하고 공통의 경험 안에 머무를 때, 우리는 서로에게 좋은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다. 자기 세계를 세우고 그 곳을 통해 걸어나갈 때 우리는 자아와 관계의 균형을 맞춰갈 수 있다.

관계를 읽는 시간


바운더리가 방어형, 배려형, 또는 그 둘을 섞은 다양한 모습을 가진 나는 모든 패턴의 유형에 걸맞은 크고 작은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절대 모자란 인간이라 생각하진 않는다. 그 경험치와 통찰이 오늘의 내가 나답게 관계 속에서 편안함을 추구할 수 있도록 길잡이가 되어주고 있으니 말이다.


20대, 30대보다 지금이 좋은 이유도 20대엔 흐릿해서 고민했던 바운더리를 공고히 하며 나답게 살아가는 방법, 30대의 내가 나다움을 잃지 않고 지혜롭게 관계를 이끌어 가는 방법, 40대의 나는 좀 더 부드럽고 완곡한 자기 표현을 할 수 있게 되면서 확고해진 바운더리를 희석시키고자 노력하는 과정 속에 있기 때문이다. 바운더리의 경계가 흐릿해지지 않고도 자유롭게 세상과 연결되는 느낌으로 관계를 확장시키고 공고해지는 내 모습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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