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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가 Aug 11. 2023

인간은 지독한 종이다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에는 생에 대한 집착도 함께 프로그래밍되어 있다

“ 인간은 지독한 종이야. 자신에게 허락된 모든 것을 동원해 닥쳐온 시련과 맞서 싸웠을 때만, 그렇게 했는데도 끝내 실패했을 때만 비로소 끝이라는 걸 받아들여. 나는 인간의 유전자에서 배양되었고, 너나 민이는 인간의 설계대로 제작됐기 때문에, 나는 우리의 내면 깊숙한 곳에는 생에 대한 집착도 함께 프로그래밍되어 있다고 생각해. “ 김영하 <작별인사>


인간은 어쩌면 지독한 종이 위에다가 결말이 나지 않은 이야기를 계속 쓰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그걸 누가 읽는지도 모른 채로 말이다. 의미를 곱씹어보지도 않고 말이다. 매우 매우 매우 힘들어하면서. 끝내 실패하기 전까지는 끝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나는 수능을 세 번을 응시했다. 수능을 세 번 응시하기 전까지 끝이라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고 세 번 응시하고 나서도 끝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내가 생각해도 지긋지긋했다. 지독한 종이 위에 써가는 나의 이야기에 내가 원하는 것은 하나도 없고 오로지 타인의 시선과 남의 의식만이 쓰여있는 그것이 부끄러웠고 나 자신을 초라해지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내면 깊숙한 곳에는 생에 대한 집착이 함께 프로그래밍되어 있다. 항상 실패를 경험하면서도, 시련과 맞서 싸우면서도 지독한 종이 위에 계속 써 내려가는 이유는 우리의 몸 안에 생에 대한 집착이 프로그래밍되어 있어서이지 않을까. 버릴 수도 없는 그 끈질긴 미련. 희망. 행복해질 수 있을 거란 그 가냘픈 희망. 그게 또 나쁘지만은 않다. 실패를 겪으면서도 슬픔을 겪으면서도 우리는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행복을 느끼고 크고 작은 아름다움을 경험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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