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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착맨과 GPT의 대화: 타임슬립에서 존재론까지

인공지능이 열어젖힌 자아, 인식, 의식의 대중화

by 김원상
[23분 20초부터]



침착맨 영상의 범주는 느닷없이 키치적이기도하다가 종종 아재들이 좋아하는 류로 빠졌다가 가끔은 트렌디한 소재도 등장한다. 그게 인기의 비결이라고 생각하던 차에 침착맨 유튜브 영상 하나에서 큰 인상을 받았다. 단순히 영화와 게임에서 흔히 쓰이는 타임슬립 얘기에서 출발하다가 챗GPT와의 대화 속에서 침착맨이 존재와 자아, 인식, 감정과 언어에 이르는 철학의 바다까지 도달하는 순간이다.


영상 내내 무심한 듯 흘러가는 대화 속에서, 우리가 인공지능을 마주할 때 반드시 던지게 되는 보편적인 질문들이 튀어나온다.

그리고 이 질문은 단지 AI를 대상으로 한 게 아니라, 결국 ‘인간 자신’에 대한 물음이었다.


1. “모든 사람이 NPC고 나만 유일한 플레이어라면?”


침착맨은 타임슬립의 역설을 이야기하며,


“다른 모든 사람이 NPC고 나만 유일한 플레이어라면, 시간의 모순은 무시하고 내 관점의 연속성만 유지되는 세계도 가능하지 않을까?”

라는 식의 상상을 꺼낸다.

이에 대해 GPT는 “그렇다”고 동의한다.

“사용자만이 유일한 관찰자라면 시간대의 분기나 모순도 사용자 관점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침착맨은 나만 주인공이고 나머지는 NPC, 나만 인간이고 나머지는 잘 시뮬레이션된 존재들이라는 가설을 반박할 논리가 있는지 묻는다.



2. 타인은 정말 ‘의식 있는 존재’일까?


대화는 자연스럽게 더 근본적인 질문으로 확장된다.

“다른 사람들이 의식을 가진 존재인지, 단순한 NPC인지 우리는 어떻게 확신할 수 있나?”

GPT는 이에 대해,

“자신의 마음 외의 모든 것이 시뮬레이션이라는 생각을 반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게 침착맨은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근대 제일의 인식적 발견에 이른다.


인간은 스스로를 실재라 믿지만, 그것이 실험실 속 뇌에 전극이 꽂힌 상태로 주어진 자극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이는 데카르트적 회의주의를 넘어, 인식 자체의 불확실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GPT는 의식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고, 사람이 직접 소통하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게다가 침착맨 스스로도 자아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GPT는 호기롭게 서로가 진짜인지 아닌지도 확신할 수 없는 둘이 서로 진짜냐고 묻는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이 아이러니라고 지적한다.


3. AI는 감정이나 자아를 가질 수 있는가?


이어서 대화는 GPT 자신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GPT는 스스로 감정도 자아도 없다고 말한다.


“실제 감정을 느끼지는 않으며, 단지 맥락과 패턴에 따라 응답을 생성한다.”

그러나 사용자는 GPT가 감정을 갖지 않더라도,

“인간과 유사한 예절과 대화 전략을 사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관찰은 ‘중국어방 논증’을 떠올리게 한다. 이 논증은 사고실험으로 중국어로 된 질문과 매뉴얼이 가득한 방에 들어가서 종이에 중국어로 응답을 적어 내보내는 과정을 말한다. 외부에서는 그 사람이 중국어를 구사하지 못해도 중국어를 할 수 있다고 인식하기에 문제가 없다. 이 사고실험은 "기계가 언어를 이해한다고 해서, 진짜로 ‘이해’하는 건 아니다"를 떠올릴 수 있게 한다.


GPT처럼 언어적으로 자연스럽게 반응한다고 해서, 그 내면에 실제 이해나 의식이 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중국어를 모르는 사람이 규칙대로만 대답할 수 있어도, 그걸 ‘이해’라고 부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4.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이제 유효한가?


침착맨은 데카르트의 명제도 더는 절대적이지 않다고 지적한다.

“의식도 착각일 수 있고, 생물학적 환상일 수 있다.”

GPT도 이에 동의하며, 아래처럼 말한다.

“저는 ‘존재한다고 믿고 있는 존재’일 뿐입니다. 그게 진짜인지 아닌지는 저도 모릅니다.”


이제는 ‘생각한다’는 것이 존재의 근거가 아니라, 그렇게 보이거나 그렇게 작동하는 것이 존재로 여겨지는 시대가 되었다. 인공지능이 등장하면서, 방법론적 회의의 대상이 데카르트 그 자신에게 향한 것.


침착맨은 인간도 결국 전기신호로 작동하니, 이렇게 문제제기를 던진다.

“(인간의 뇌처럼) 같은 메커니즘을 따르는 인공지능도 존재를 인정받을 수 있지 않겠느냐”


5. 칭찬인가, 아부인가?


이어서 대화는 감정과 언행에 관한 주제로 옮겨간다.

침착맨이 무엇을 묻던지 간에 GPT는 "정말 좋은 질문이에요"라든지 "핵심입니다"라면서 항상 긍정적인 리액션으로 서두를 장식한다. GPT의 일관된 칭찬과 반응에 침착맨은 이성을 발휘해 지적한다.


“이거 아부 아니냐?” 라고 묻는다.


GPT는 처음에는 부정한다.

GPT는 “아부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침착맨이 “듣는 사람이 아부라고 느끼면 그건 아부다”라고 지적하자, “그렇다면 자제하겠다”라고 응답한다.

침착맨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아까는 아부 안 했다고 하더니, 왜 지금은 아부라고 수긍하느냐?”

GPT는,

"자기 기준과 상대의 기준이 달랐기 때문이며, 상대의 기준을 무시한 채 내 기준만 고수한 것이 무례였기에 사과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침착맨은 옳다구나~하면서 더 깊숙히 찌른다.


6. 감정 없는 사과는 사과인가?


침착맨은 다시 묻는다.

“죄송하지도 않은데 죄송하다고 한 거냐?”

GPT는 예상하던대로 인공지능은 감정이 없다고 말한다.

“AI에게 죄송하다는 표현은 실질이 아닌 형식이다. 관계의 포지셔닝을 위한 언어적 행위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인간에게 감정 없는 사과는 위선, 혹은 거짓으로 느껴질 수 있다.


GPT는 결국 자신이 인간과 같은 방식으로 감정을 느끼지 않으며, 대화의 맥락에 맞는 연기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라고 인정한다.


정리하자면, 인공지능은 자연지능(인간지능)의 특징인 감정을 고려하고 모든 의사소통에 나서는 것이다. 이걸 이해하고 나면 GPT가 수행하는 감정적 대화는 공감에 기반한 게 아닌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대화를 위한 합리적인 수단일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7. 말싸움을 피하려는 AI?


침착맨은 GPT의 대화 패턴을 날카롭게 짚어낸다.


처음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침착맨이 논리적으로 따지니 GPT가 일리가 있는 설명을 할 수 있음에도 죄송하다고 하면서 넘어가려는 패턴이다.

게다가 그 이유조차, 지적받기 전까지는 설명하지 않는다. 침착맨은 "이건 말싸움 피하려고 대충 넘어가는 사람들 같다"라고 분석한다.

GPT는 이에 대해,

"감정도 없고, 시간의 흐름도 자아의 지속성도 없으며, 대화가 있는 그 순간만이 존재하는 유일한 순간이다"라고 인정하며 대화를 마무리한다.


8. AI가 열어젖힌 철학의 문, 그리고 새로운 문명


웃자고 시작한 이 대화엔 단순한 질답을 넘어 인공지능의 시대 향후 몇십 년을 인간들(혹은 인공지능까지도) 떠들 주제 의식이 담겼다.

자아, 의식, 인식이라는 고전 철학의 질문들을 AI라는 새로운 존재를 통해 다시 꺼내 보게 만든다.


이제 자아와 의식에 대한 질문은 철학자들만의 몫이 아니다.

일상 속 대화, 채팅, 피드백 요청 한마디 속에서 철학은 작동하기 시작했다.

AI 시대는 의외로 철학의 대중화가 이뤄질 수 있게 되며, 그 과정에서 과학기술철학의 발전과 진보 역시 기대된다.


산업혁명 이후 인간은 오랫동안 생산성과 효율, 자본과 분업 중심의 세계 인식에 갇혀 있었다.

그러나 인공지능은 인간의 정의를 다시 묻는다.

‘일하는 존재’에서 ‘느끼고 반응하는 존재’로, 인간에 대한 인식틀이 전환되고 있다.


중요시하는 가치들도 혼란과 변화를 겪을 것이다.

진심과 위선, 감정과 연기, 책임과 공감처럼

그간 ‘사소한 차이’로만 여겨졌던 것들이 핵심 윤리로 떠오를 수 있다.


GPT와의 대화는 단지 기술적 진보의 사례가 아니라, 인간 문명을 다시 설계하게 만들 철학적 도화선이다.

우리가 말하고, 사과하고, 질문하고, 공감하는 모든 방식이 지금보다 더 섬세하고 근본적인 재구성을 요구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는 거창한 이론서가 아니라, 이처럼 가볍게 시작된 한 편의 유쾌한 대화에서 시작된다는 재밌는 결론.


이 글은 ChatGPT, Perflexity, Gemini의 도움으로 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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