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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단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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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월칠일 Aug 06. 2023

근데요, 그래서요, 그러니까요





어렸을 때요? 저 어렸을 땐 딱히 특별할 거 없었는데. 정말로 별거 없을 만큼 소심하게 사는 아이였어요. 어느 정도였냐면, 엄마랑 마트에 갈 때마다 과자를 딱 하나만 고르게 하셨는데 그걸 못 고르고 한참을 고민했대요. 기다리다 지친 엄마가 저를 두고 장을 한 바퀴 돌고 올 때까지. 얘가 지금쯤 다 골랐겠지 하고 다시 과자코너에 가보면 저는 처음 그 자세 그대로 여전히 고민하고 있는 거죠. 아니면 양손에 과자를 들고 '엄마 못 고르겠어요' 하면서 울먹이고 있거나. 어떤 성격인지 감이 오나요?


아, 그리고 어릴 땐 명절이 제일 두려웠어요. 친척들 앞에서 이모 삼촌 하면서 애교 부리고, 넙죽 절하고 용돈 받아 가는 그런 거 진짜 못하거든요. 그냥 엄마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바닥만 보고 있다가 등 떠밀면 그제야 꾸벅 인사하고 그랬어요. 어른들이 돈을 쥐여줘도 개미만 한 목소리로 감사합니다- 하고 마는, 아주 붙임성은 제로에 수렴하는 애였죠. 네? 지금은 전혀 그렇게 안 보인다고요? 아유 그럼요. 어릴 때 비하면 완전 용 된 거죠. 그땐 부모님이 저거 학교 가서 친구나 사귈 수 있을까 걱정하실 정도였으니까.


아무튼 그 정도로 소심한 아이였어요. 소심하니까 친구가 별로 없고, 친구가 별로 없으니 말을 잘 안 하고, 그러다 보니 말주변이 영 좋지 않았죠. 말도 웅얼웅얼하고. 누가 질문이라도 하면 혹시나 잘못 말할까 봐 속으로 한 번 더 생각하고 말을 꺼냈어요. 그러다 보니 대답이 한참 느려지고. 그걸 보는 어른들은 속이 터지고 뭐 그랬죠. 하하. 그때 부모님께 가장 많이 들은 꾸중이 이거였는데, 똑같이 따라 해 볼게요. 하도 많이 들어서 성대모사할 수 있어요.


"너는 말할 때 꼭 앞에 필요 없는 말을 붙이더라. 근데요, 그래서요, 그러니까 제 말은요. 이런 것들 좀 빼고 핵심만 말할 수는 없니?"


네. 맞아요. 접속사를 많이 붙였어요. 치킨 먹고 싶다는 말 하나 하는데 '저기. 그런데요, 저는요, 치킨이 먹고 싶어요.'라고 했죠. 지금은 많이 고쳤지만 아마 의식하고 들으면 여전히 느껴질 거예요. 오랜 습관이라 그런지 쉽게 고쳐지지 않더라구요. 근데 있잖아요. 사실은, 저 별로 고치고 싶지 않았어요. 왜냐구요? 그게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거든요. 오히려 그런 단어들이 나라는 사람을 설명해 주는 말이라고 생각했어요. 어떤 사람들은 아무 의미 없는 단어라고 싫어하는데, 저는 좋아해요. 아니 좋아한다기보다 정이 가요. 그런 군더더기가 제게는 꼭 필요한 수식어거든요. 소심한 사람들이 큰맘 먹고 자신의 의견을 말하기 전에 쓰는 노크 같은 단어. 무리 속에서 당최 존재감이 없는 무채색 같은 사람들이 저 여기 있어요- 하면서 살짝 손드는 것 같은 조심스러운 단어예요. 근데요, 저기요, 그래서요. 그 말을 하는 몇 초의 시간 동안 저는 상대방과 눈을 맞추고 표정을 살피면서 말을 전할 마음의 준비를 해요.


요즘은 다들 간단명료한 문장을 원해요. 거추장스러운 수식어를 빼고 하고 싶은 말을 한마디로 표현하라고들 하죠. 그래서 저도 그렇게 말하고, 글 쓰고, 생각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어릴 때와는 다르게 핵심만 간단히 말하는 것도 이제는 썩 잘한답니다. 근데요, 가끔은 좀 그럴 때가 있어요. 군더더기를 붙인 소심한 저의 화법이 그리워지는 그런 때가. 깔끔한 문장은 매끄럽지만 너무 빠르게 느껴져요. 부끄러움이나 주저함도 없고요. 직선으로 사람의 마음에 꽂히는 문장은 강력하지만 그만큼 마찰력이 클 때가 있어서, 마음이 지친 날에 그런 글을 읽으면 눈가가 따끔거려요. 다들 아무렇지 않은데 혼자만 이런 생각을 하는 제가 유별난 거겠죠?


가끔 저와 닮은 사람을 만나 대화할 때가 있어요. 분명 표정은 하고 싶은 말이 한가득인데, 말은 그에 비해 턱없이 느린 사람들. '만나서 반갑다'는 한마디면 되는 걸 딱히 필요 없는 말까지 한껏 붙여 느릿느릿하게 안부를 전하는 사람들 있잖아요. 근데 저는 그게 싫지가 않더라고요. 더듬더듬 이어지는 단어의 틈 사이에서 그보다 몇 배는 많은 마음의 언어를 읽을 수 있거든요. 말을 고르는 쉼표가 늘어날수록 상처 주지 않으려는 신중함이 보이니까, 그 애정이 오히려 예뻐 보여요. 그러니까 당신도 너무 자신의 소심함을 탓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얼마 대화하지도 않았는데 당신, 속마음은 꽤나 수다쟁이처럼 보이네요. 나를 만나서 얼마나 들떴는지도 알 것 같아요. 많은 말을 쏟아내고 싶은데 혹시나 속도를 주체하지 못해 대화가 삐끗하고 넘어질까 봐 조심하고 있는 거죠? 일부러 군더더기를 넣으면서 숨을 고르고 말을 조절하는 게 느껴져요. 마음의 보폭을 말이 따라가지 못해 답답하더라도, 그 간극을 좁히려 너무 애쓰지 말아요. 당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앞에 있으니까.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느냐고요? 

그게, 그러니까... 저도 당신과 같은 마음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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