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아침 눈 비비고 일어나 세수하고 일터로 향한다. 덜 마른 머리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이 흥건히 어깨에 지도 자국을 남기지만, 아직도 잠이 오는 직장인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잠시나마 꿈을 꾼다. 내려야 할 역에 도착하자 초인같이 번쩍 눈을 뜨고, 지하철 문이 닫히기 전에 용수철처럼 튀어 나간다. 저 멀리 높고 커다란 건물 하나가 하루 사이에 더 칙칙해 보인다. 오늘도 출근한다. 회사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퇴근이 그리워진다.
출근
일터로 근무하러 나가거나 나옴.
퇴근
일터에서 근무를 마치고 돌아가거나 돌아옴.
앞 글자 하나 다르다고 느껴지는 무게와 기분이 완전히 다르다. 직장인이 월급만큼 좋아하는 말이다.
나의 직장은 연구소였다. 딱히 연구원이 될 생각은 없었지만, 그냥 전공을 마치고 이 길을 걷다 보니 연구원이 되었다.
어릴 때부터 나도, 우리 가족도 참 많이 아팠다. 자연스럽게 대학교 전공을 생명 쪽으로 선택했다. 그저 아프고 싶지도, 아픈 사람을 보기도 싫어서 어떤 약을 만들면 좋을지 공부했다. 아픈 것이 싫은 것은 육체에 느껴지는 고통뿐만 아니라, 한정된 시간을 잡아먹히기 때문이다. 나는 남들보다 3년이나 늦게 대학교에 갔다. 그래서 더 악착같이 시간을 보상받기 위해 빽빽한 일정표를 짜서 수업과 과제에 매달렸다.
장학금은 나를 반겼지만, 대부분 동기는 나를 싫어했다. 나는 어울리지 못하는 늙은 외톨이였다. 하지만 무리 속에 억지로 있지 않고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떠돌이란 점은 좋았다. 또, 사람들과 가끔 대화를 하다 보니 더 가치 있게 마음을 쏟을 수 있었다. 이 생활은 연구원이 돼서도 비슷했다. 나는 소수의 사람 하고만 친했다.
하지만 사람은 무리 안에 있어야 하나 보다. 나는 견제할 필요 없는 솔로 생활 때문에 스스로 몰아붙이는 호랑이 조교가 되었고, 점점 버거운 일정에 성격이 예민해졌다.
다행히 연구실 생활은 나랑 딱 맞았다. 피부처럼 착 달라붙은 완벽주의가 논문을 읽고, 연구하고, 결과보고서를 쓰는 데는 제격이었다. 하지만 생활이 지속될수록 집착에 가까울 만큼 완벽주의가 심해졌다. 자주 끼니를 걸렀고, 미친 듯이 논문을 읽었고, 쉬지 않고 실험을 했다. 몸이 부서질 것 같았지만 ‘버린 시간이 너무 많아! 더 달려야 해!’라며 나를 채찍질했다.
더 나를 멈출 수 없게 한 것은 ‘잘한다’라는 소리였다. 나는 그때까지 그 안에 담긴 무서운 의미를 몰랐다. 참뜻은 '잘한다'가 아닌, ‘더 해라’는 것이었다. 바보였던 나는 칭찬을 들을수록 실망을 주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일했고, 그 결과 인간미를 상실한 일 중독자가 되었다.
직장인은 여러 사람과 어울리며 조직 속에서 일한다. 모든 일이 성공하진 않지만, 가끔 운으로 혹은 자신의 노력으로 인해 '잘한다'라는 소리를 듣게 된다. 같은 말을 하더라도 누가 뱉느냐에 따라 달라지는데 엄마, 친구, 상사의 말의 뜻이 같지 않다. 엄마와 친구는 진심일 수 있지만, 상사는 거짓일 수 있다.
나는 사회에서 거의 칭찬을 못 듣게 돼서야 '잘한다'는 참뜻을 알았다. '더 해라' 병에 걸린 일 중독자는 동기에게 미움과 부러움을, 상사에게 신뢰하는 척과 막대함을 받는다. 그냥 어떤 병에도 걸리지 않고 직장을 다니는 것이 가장 좋다.
처음 학교를 떠돌다가 사회로 나왔을 때, 나는 새로운 시작에 들떴고 정착할 줄 알았다. 안정된 직장과 직함이 생기는 거니까. 하지만 사회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나는 또 떠돌이처럼 지냈다. 보호해 주는 친구도, 선배도, 아무도 없었다. 일하면 할수록 마음이 텅 빈 공갈빵처럼 조금만 건드려도 부서지고 상처를 받았다. 하루하루 눈물로 보내는 날이 길어졌다. 사회는 강했고, 나는 약했다. 그동안 감정 따위 무시한 채 살아온 결과였다. 너무 코앞의 일만 보고 달렸고, 미래를 준비하지 않았으니 당연했다. 이제는 나에 대해서, 또 앞으로의 삶에 대해서 생각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