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리똥 May 06. 2023

이 꽃 냄새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모르면 간첩이지

비가 오렸는지 아침부터 하늘이 어둡더니 이내 이슬비가 내린다. 이 정도 비 내리는 걸로 우산은 필요 없어 보였다. 직장에서 점심을 먹은 후, 우리는 어김없이 산책을 했다. 빨리 걷지 않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오늘은 어떤 소리와 냄새가 날까 한껏 기대하며 작은 길을 나선다. 참새소리와는 다른 특이한 새소리가 울려 퍼진다. 머리는 황금왕관을 두른 것처럼 노랗게 생긴 작은 새인데, 하는 짓이 얼마나 날렵한지 모른다. 잠시도 멈추지 않고 여기저기 소리를 내며 날아다니느라 바쁘다. 점심시간이라 벌레를 찾는 걸까. 나무 사이에 앉아있는 송충이를 찾는 걸 테다. 으휴, 송충이는 생각만 해도 징그러운데 녀석들의 맛있는 한 끼 식사라고 생각하니 순간 팔에 나있던 수많은 털들이 바짝 선다. 우리는 말한다. "새야 안녕!"


땅바닥에는 손가락보다 더 긴 지렁이가 방향을 잃고 두리번대고 있었다. 그냥 두면 분명 말라죽을 테지만, 오늘은 비 내리는 날이니까 한 껏 놀다가 집으로 돌아가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사실 지렁이도 좀 징그러워서 오래 들여다보지 않고 곧바로 발길을 돌렸다.  "지렁아 안녕!"


봄이 가고 여름이 오려는 듯, 화려한 색깔을 뽐내던 철쭉꽃이 하나둘씩 떨어지고  바닥은 철쭉꽃산이 만들어졌다. 이미 떨어진 지 오래된 꽃은 색 바래져 갔고, 나무에서 떨어지기 싫은지, 꽃 술을 잡고 그대로 대롱대롱 매달려있어 위태로 꽃도 있었다. 꽃이나 사람이나 청춘이 지나면 언젠가는 자연의 섭리대로 지기 마련. 청춘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사소한 고민들로 가득 채웠던 지난날이 떠올랐다. 젊음 하나로도 충분히 행복할 나이였는데, 젊을 때는 내가 마냥 이 모습일 줄 알았다. 마냥 나는 청춘일 줄 알았다. 함께 산책하던 언니는 이따금씩 말한다. "내가 우리 엄마 나이가 될 거라고 누가 알았겠어. 꽃이 지듯 사람도 나이가 들면 늙는 건 당연한 이치야. 하지만 나도 해마다 다시 피는 꽃처럼 내 청춘도 다시 시작되었으면 좋겠다."

"철쭉, 그래도 넌 이제 한창이야. 힘을내렴!"


산책을 나설 때보다 조금 더 많은 비가 내렸다. 언니는 짧은 웨이브머리에 한껏 뽕을 넣고, 마치 깐깐한 학교 선생님 느낌이었다. 내가 그녀를 처음 봤을 때 그랬다. 깔끔하고 단정한 외모에 어딘지 모르게 차갑게 느껴지던 모습이었으니까. 그랬던 언니가 이슬비를 맞더니 한껏 뽕을 넣었던 머리카락이 모두 주저앉았다. 앞머리는 눈앞을 가릴 정도였다. 언니 모습이 재미있어서 웃었더니 그렇게 흉하냐면서 어떡하냐고 한다. 그래도 괜찮다. 비에 맞은 머리가 쭉쭉 뻗으니 더 친근해서 좋다고 말했다.

우리가 수다를 떠는 사이 어디선가 기분 좋은 냄새가 풍겼다. 비바람이 준 선물일까. 킁킁킁. 이런 냄새는 정말 오랜만이다. 달콤했다. 신선한 냄새였다. 계속 맡아도 질리지 않는 냄새였다. 주위를 둘러본다. 포도송이처럼 하얗게 쏟아져 내려있는 정체 모를 꽃이 피어있다. 분명 그 꽃에서 풍기는 냄새다. 우리는 꽃 주위로 다가갔다. 정말 이 꽃이 맞다. 나무가 크고, 동그란 잎사귀들이 대롱대롱 달려있다. 잎사귀들 사이로 하얀 꽃이 대롱대롱 매달려있어서 정말 하얀 포도송이 같았다. 근데 그 포도송이 같은 꽃에서 화려한 냄새가 난다. 마치, 나는 이런 멋있는 꽃이야라는 것처럼. 근데 가지사이에 작은 가시가 달려있다. 순간 꽃에 취해서 손을 댔다가 가시에 찔렸다. 이런, 빨갛고 맛있게 생긴 독사과를 한 입 베어 물고 그제야 독사과인 줄 알았던 백설공주 이야기가 떠올랐다. 물론 나는 백설공주와는 다르게 생겼지만, 꽃을 지키고 있는 작은 가시를 보니 나야말로 이 세계에 훼방꾼이 된 것 같았다. 그래도 어찌해, 이렇게 훌륭한 냄새를 가진 꽃을 만났는걸!


언니는 당장 꽃을 따서 사무실로 가져가자고 했다. 포도 꽃송이 한 개, 두 개, 잎사귀는 덤으로 가져왔다.

마땅한 화병이 없으니 종이컵에 휴지를 넣고 물을 부어 꽃을 꽂아두기로 했다. 폼이 나진 않지만, 일을 하며 언제든 이 꽃을 볼 수만 있다면 지루한 업무도 힘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꽃의 꽃 말은 '품위'이다. 특히 이 꽃은 지금 시기에 가장 많이 핀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벌꿀도 이것이 많다지. 바로 '아카시아 나무'이다. 이들에겐 지금이 한창 젊음을 뽐낼 시기이다. 어릴 적에는 이 꽃을 따서 달콤한 꿀이 나온 다며 쭉쭉 빨아먹기도 했고, 잎사귀 뗀 가지로 보글보글 파마머리도 만들었다. 파마가 어찌 잘 되던지 마치 흑인들이 잘하는 머리가 되었다며 까불던 시절이 있었다. 아카시아 나무는 그렇게 어릴 적 내 동무이기도, 동생과 나는 나무와 함께 성장했고 지금은 다 큰 어른이 되어 있다.


작은 새, 지렁이, 철쭉꽃, 아카시아 나무...

짧은 산책길에서 만난 인연이 이렇게 귀하다. 킁킁킁, 아카시아 꽃 냄새가 여전히 퍼지는 내 일터.

언니와 나누는 고운 산책길 여정이 끝날 때 하루가 저문다. 오늘도 참 고운 하루를 보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