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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경 Apr 05. 2024

산책을 느리게 느리개

 바람이 시원하게 분다. 3월, 메마른 잔디 위에 초록이 번진다. 우리 집 시바견 비빅이는 너무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바람을 마주하고는 눈을 감는다. 바람을 느끼는 건가. 기분 좋은 표정이다. 나는 매일 하루에 두 번, 오전과 오후에 비빅이와 산책을 한다. 밤 산책은 남편이 맡고 있으니 도합 세 번이다. 귀찮을 법도 하지만, 실외에서만 배변을 하는 비빅이를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악천후로 정해진 시간을 뒤로 미루는 경우는 있어도 결코 빼먹지 않는다. 그러기를 5년째. 그의 산책은 여느 강아지와는 다르다. 느리고, 고집스러우며, 융통성이 있고, 배려가 가득하다.


 벌써 5분이 지났다. 아무것도 없는 땅에 코를 박고 킁킁거리고 있다. 무슨 냄새를 맡는 건지 움직이지도 않는다. 올해로 5살이 된 비빅이의 걸음은 느릿느릿하다. 아니, 여유롭다고 해야 할까. 나이가 많은 것도 아닌데 나 혼자 걸으면 20 ~ 30분 되는 산책길을 1 시간 가까이 걸을 때가 많다. 산으로 산책을 갈 땐 지나가는 청설모나 새를 구경하기도 하고, 나무나 풀 냄새를 맡기도 한다. 바람이 시원하고 덥지 않은, 비빅이가 좋아하는 날엔 가만히 서서 덧없이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엄마의 사회성이 부족한 탓에 인사는 못할 때가 많지만, 다른 강아지를 눈으로 한참 살피기도 한다.



 그저 발이 가는 대로, 엄마가 이끄는 대로 걷다, 쉬다 하는 것 같지만 그건 또 아니다. 종종 '이 길로 가겠노라' 고집을 피울 때가 있다. 솜방망이 같은 발로 버티고 서서 엉덩이를 뒤로 뺀다. 무게 중심을 뒤로 한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가만히 쳐다본다. 그럴 땐 비빅이가 가고 싶은 길이 있다는 것. 산책을 길게 할 수 없을 때는 줄을 당기거나 안아서 데려가기도 한다. 그러나 보통은 그의 의견을 존중한다. 마당 있는 집(이사오기 전에 살던 집이 주택이었다)에서 살 때와 달리 콧구멍에 바람을 넣는 시간이 하루에 1 ~ 2시간 밖에 되지 않아 안쓰러운 마음에서다. 무조건 밖이면 오케이 할 줄 알았는데. 좋아하는 배변 자리가 있고, 매번 다른 길로 산책하는 것을 선호한다.


 산책이 싫을 땐 지름길을 이용하기도 한다. 아파트를 크게 빙 돌지 않고, 동과 동 사이를 가로지른다. 그리곤 급한 볼일만 해결하고 집 방향으로 몸을 튼다. 10분도 채 지나지 않은 시간이다. 보통 비빅이가 싫어하는 아주 덥고 뜨거운 날 또는 비 오는 날에 그렇다. 융통성을 이렇게 발휘하나. 그래도 그런 날은 나도 걷기 힘드니 그의 비위를 맞춰준다. 무표정한 얼굴로 심드렁히 바라볼 때가 많아 생각이 없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가. 어떤 길로 가야 배변 자리가 나오는지, 집이 나오는지 알고 있다.


 그렇다고 늘 고집쟁이인 것은 아니다. 엄마가 언제 느리게 걷는지, 힘들어하는지 알고 있는 것 같다. 나는 내리막길을 잘 내려오지 못한다. 특히 산에 올랐다가 내려올 때 계단을 만나면 시간이 남들보다 두 배는 더 걸린다. 좌, 우 시력 차이가 커 계단에서 발을 헛디딜 위험이 있어서다. 그럴 땐 비빅이는 리드줄이 당겨질 만큼만 먼저 내려가서 엄마를 기다려준다. 밑에서 다정하게 쳐다봐주면 더 감동일 텐데. 츤데레다. 그저 앞만 보고 있다가 줄이 느슨해진 것 같으면 다시 내려가기 시작한다. 배려일까, 줄이 당겨지는 것이 싫어서일까. 배려가 아닐지라도 늠름하게 서 있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 내 입가엔 빙그레 웃음이 나온다.



 비빅이의 걸음에 맞춰 천천히 걷다 보면 시간을 선물 받는다. 그와 함께 걷는 느린 산책은 하루 종일 바쁘게 반복되는 나의 일상에 쉼표가 되어준다. 나 자신에 대해 돌아보고, 고민해 볼 수 있는 여유를 가져다주기도 한다. 수년 째 제자리걸음인 내 일. 나는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걸까. 아이를 임신했을 무렵, 직장을 다니던 시절 받던 월급 정도는 벌어보겠다고 호기롭게 시작한 일들이 삐그덕거린다. 자신감도 같이 흔들린다. 나는 지금 잘 살고 있는 걸까. 비빅이처럼 느리더라도 가고 싶은 길을 고집스럽게, 그러면서도 급할 땐 유연하게, 남편과 아이,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며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 조금 더 걸어가 봐도 괜찮겠지. 비빅이와 의자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산책을 이어간다. 느리게 느리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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