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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반스토니언 Nov 12. 2024

그 맘 변치 말도록

건설업 관련 교육을 받고 왔다

말이 좋아 ‘작가’지, ‘글로소득’이란 결국 한계가 있는 것이다. 


예전에 ‘녹색평론’에서 이런 글을 본 적이 있다. 자식이 글을 써서 먹고 살겠다고 하자 농부인 부모가 ‘얘야, 내가 장터에 나가봤는데, 아무도 글 사겠다는 사람은 없더라’라고 했단다. 그와 마찬가지인데, 여러 화가들의 전시를 가봤다. 그들이 몇몇 명작을 남기기까지는, 무수한 쓸모없어뵈는 습작, 먹고 살기 위해 그린 그림들이 있었다. 자신의 욕망과 달리 시류가 원하는 그림을 그리다 명작을 남기기도 했다. 


나도 집에 보탬이 되기 위해 뭐라도 해야 한다. 글을 계속 쓰기 위해서는 뭐라도 해야하는 것이다. 지인이 소개해줄 일자리가 있는데, 그걸 하려면 ‘건설업 기초안전보건교육’ 4시간을 이수해야 한단다. 소위 말해 ‘노가다’는 아니지만, 여하간 건설현장과 관련이 있는 일이었다. 백면서생에 섬섬옥수를 자랑하는 내게는 건설현장만큼 치열한 삶의 현장이 또 있을까 싶은데. 거기에 삶이 있고 이야기가 있을 것이기에, 주저 없이 수강신청을 했다.


그간 수업이라면 드높은 칼리지에이트 고딕(collegiate Gothic) 양식의 고성 같은 곳에서 공부를 한 거 밖엔 없다. 교육을 듣기 위해 이른 아침, 출근하는 사람들과 함께 지하철을 타고, 번화가에 우르르 내렸다. 모처럼 춥다는 날이라, 모르는 길, 모르는 경험 찾아가는 길이 더욱 춥게 느껴졌다. 


아무개 프라자라는 건물에 이 수업 외에도 바리스타니, 양식한식이니, 각종 기능 일을 가르치고 시험을 보는 교육원이 있었다. 거기에서 안전교육도 하는 모양이었다. 중년의 여성 여럿과 엘리베이터를 탔다.  ‘아유 언니는 너무 잘하잖아~’ ‘아니야~ 나도 수업 시간엔 시계만 쳐다보고 있어~’ 알만한 대화가 오간다. 우등생은 그렇게 자신의 실력을 감추게 마련이다. 나의 교육장에는 다섯 명이 더 있었다. 젊은 남자 청년 하나, 나 포함 중년 아저씨 셋, 중년 아주머니 둘이 전부였다. 강사는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퇴직자였다. 주로 안전과 관련한 일을 해온 듯 했다. 


내 앞의 중년 아주머니는 ‘33년만이에요~ 일을 하러 나가는 게~ 사위가 미리 들어놓고 있으래서 왔어요’ 한다. 산전수전 다 겪으며 여하간 아이들을 길러냈을, 주부로서의 아주머니의 일상에 상을 드리고 싶었다. 그 정도면 박사학위시라고. 육아랑 살림 이중 전공이네요. 고생하셨어요.


내용은 1. 한국이 OECD국가 중 단연 건설업 사망률이 높다. 매년 8백명이 죽는다. 2. 그 중 70%는 사업규모 50억 미만으로 중대재해처벌법에도 해당 안되는 빌라나 근린상가시설 건축현장에서 일어난다. 3. 그중에서도 추락사가 가장 많다. 특히 엘리베이터나 낭떠러지 추락사가 많다고. 4. 안전대, 안전줄, 안전난간, 안전망 등이 있어야 하지만 아마 현장에서는 귀찮다고, 공기 늘어나고 예산 많이 든다고 해서 없는 모양이다. 작업자 본인이 문제제기를 하면 공사를 중단할 수는 있지만 누가 그렇게 하겠는가. 생업이 달린 일인데. 



의외로 대기업 대형현장은 오히려 안전한 편이라고 한다. 그러면 문제는 돈이 우선인 작은 건물 토지주, 소유주들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 조그맣고 오밀조밀 들어선 무수한 건물들이 결국은 다 숱한 사람들의 시체 위에 세워지고 있다는 말이다. 건축법으로 사망자 추모비를 머릿돌에 새기게 한다면 어떨까. 


결코 삼풍백화점으로부터 배우지 못했다는 것이 최근의 순살아파트 사태, 광주 화정동 현대아이파크 지지대 붕괴 사태를 보면 그대로 알 수 있는 것이다. 대기업이라도 제재하게 됐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황당한 건 미국 건설현장의 사망사고율도 꽤 높다는 것이다. OECD평균을 상회한다. 그러니 사람 생명을(특히 이민자의) 돈보다 아래 놓는 미국식 자본주의는 결코 한국의 대안이 되지 못한다. 안전사고가 드문 독일, 영국 같아져야만 한다. 우리 자신부터가 더 비싼 집값과 더 느린 완공을 감당할 수 있을까? 결국 문제는 돈이다. 


집에 와 잠자리에 들면서 아내에게 이런 이야기를 조곤조곤했다. 그러자 아내가 잘라 말한다. ‘그건 건물주들이 법을 만들어서 그런거야. 법이 그 사람들을 위해 있는거지.’ 실오라기 하나 없이 완전히 나체로 발가벗겨진 우리 사회가 떠올랐다. 현실은 찬바람이 쌩쌩부는 바깥같은 것이었다.


중소기업, 건설현장, 기타 비숙련 노동에는 젊은 한국 사람들이 없다. 계약은 불투명 그리고 불리하고, 일하는 시간은 길고, 일하는 곳은 편의문화시설과 동떨어졌다. 차라리 덜 벌더라도 계약 분명하고 주 40시간만 일하고 여가를 보낼 수 있는 곳을 원하는 것이다. 기업도 나라도 부자다. 그런데 99냥 가진 부자의 1냥 이윤을 위해, ‘사람을 갈아넣는다’는 곡소리가 나는 것이 ‘현장’이다. 


자원없는 땅에 사람만 많아 결국 사람이 자원인 나라가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황금알을 낳는 오리배를 갈랐더니 더는 사람들이 태어나지 않게 된 것이다. 오리는 꽥 소리 낼 힘도 없어 조용히 죽어간다. 


현장에서 정당한 비용을 치뤄 질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서 자국민들을 고용하면 만사 해결될 일을, 그걸 안하려고 외국인 데려다가 계속 갈아넣고 있는 중이다. 나는 이것을 ‘악’이라고 부른다. 동성애가 악이 아니다. 회사에 악인 1명 물리치는데 선인 10명이 필요하다는 통계가 있단다. 일부 악한 건물주, 사업주보다 선량한 시민들 숫자가 훨씬 많으니, 결국 우리나라는 잘 사는 나라가 되지 않을까, 신앙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응답 느린 기도를 또 올려본다. 


그런 날이 올때까지 우리는, 악인 한 명의 난장과 칼부림을 당해내면서도, 결코 ‘악으로 악을 갚지 아니하고 선으로 악을 이겨야’할테다. 사람이 스러진 자리를 끝끝내 추모하고 ‘여기 사람이 있다’고 외치자. 


우리, 마음 변치 말자. 마음 굳게 먹자. 



사진-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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