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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반스토니언 Nov 14. 2024

더 나은 이들을 위하여

Better People Making

영화 ‘기생충’에서 기우 엄마 충숙은 바보같이 속는 사모님 가족을 두고 이런 말을 했다. ‘그 사람들이 부자라서 착한 거야. 나한테도 돈 있었어봐. 그 사람들보다 더 착하지.’ 나는 대학시절에 멤버십이 백 명이 넘는 대학 선교단체 활동을 한 적이 있다. 거기에서는 그만큼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집이 너무 어려워 공학용 계산기도 살 수 없던 청년부터해서 압구정 현대아파트에 사는 청년까지 다 있었다. 선교단체에서는 이렇게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을 인격적으로 깊이있게 대하기를 사랑실천의 방도로 추구했는데, 요즘 유행하는 MBTI는 이미 그 오래전부터 거기에서 쓰이던 방법이었다. 하지만 막상 여러 친구들의 ‘삶 나눔’과 인생그래프 이야기, 말할 수 없던 가정사 등등을 듣다보니, MBTI보다 더 진한 건 출신배경이구나라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잘 사는 친구들이 가난한 친구들보다 성격이 꼬인데 없이 긍정적이고 별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태어나서부터 뭐 하나 앙칼지게 그러쥐어야했던 경험 자체가 없는 친구들은 죄의 문제에 있어서도, 대체로 선량했기 때문에, 자신이 왜 죄인인가를 납득시키는데 많은 노력이 필요했었다. 물욕이 있어? 하나 더 사서 나눠쓰면 되지, 식의 사고방식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시기질투를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남 부럴 거 없이’ 살아온 그들에게도 깊이 들어가면 부모님과 사이가 좋지 않거나 가정에 상처가 있는 경우도 적지 않기는 했다. 


인터넷 같은 데에도 보면, 생각 외로 부자들이 더 나이스하고 예의바르고, 가난한 사람들 사는 동네는 밤낮 물건깨지고 그악스럽게 소리지르고 싸우고, 사람들이 못됐고, 그런 이야기들이 심심치 않게 돌아다니는 걸 볼 수 있다. 주변에 초등교사를 하는 친구도 동네따라 다르다며, 가난한 동네일 수록 학교와서 패악부리고 난리치는 부모들이 더 많다고 했더랬다. 


정말 충숙은 돈이 없어 부도덕해진 것일까? 그에게 벼락같이 많은 돈이 생기면 선량하고 너그러운 부자가 될 수 있을까? 가난한 사람들이 그악스러워진 것은 정말 돈이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렇게 된 것일까? 


나는 여기서 또다른 인간군상을 끄집어 내야겠다. 그것은 가난하면서도 지킬 건 지키고 사는 사람들이다. 유대인 수용소에 갇혔던 신경학자 빅터 프랭클은 그의 책 <죽음의 수용소에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살아있는 인간 실험실이자 시험장이었던 강제 수용소에서
 어떤 사람들이 성자처럼 행동할 때, 또 다른 사람들은 돼지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았다.
 사람은 내면에 두 개의 잠재력을 모두 가지고 있는데,
 그 중 어떤 것을 취하느냐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본인의 의지에 달려 있다.”


충숙의 경우는 가난이라는 굴레속에서 돼지처럼 행동했던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악한 방법으로 일자리를 빼앗았기 때문이다. ‘먹고 살기도 바쁜 사람들한테 도덕의 잣대까지 들이미냐!’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에는 가난해도 선량하게 사는 ‘순진’한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그런 예를 동남아나 아프리카에서 무수히 찾을 수 있다. 거기엔 가난해도 선량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세계적으로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대단한 유행을 탔다. 나는 외국인들이 케이 컨텐츠에 열광하는 이유 중 하나로, ‘한국적인, 한국에서만 나타나는 상황’이 주는 흥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중 하나는 바로 가난해서 그악스럽고 악독하게 사는 일그러진 인간군상들이다. 이들이 벌이는 ‘만인의, 만인에 의한 투쟁’이 인간성이 어디까지 파괴될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묘사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모두가 어떤 형태로든 결핍을 경험하는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러저러한 결핍과 상처에도 불구하고, 참된 인간답게 살기를 포기하지 않고도 충분히 잘 살 수 있다. 날마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소리없는 총성이 빗발치는 전쟁터같은 삶 속에서도, 누군가는 포로들을 마음대로 학살하기 보다, 교전규칙대로 포로를 인격적으로 대할 수 있어야만, 이기든 지든 전쟁 이후의 삶에서 ‘희망과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포로수용소의 해넘이를 보며 찬란한 영광에 감응할 수 있던 마음들만이 인간으로서 죽고 살 수 있었다.




사진-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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