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반스토니언 Nov 21. 2024

Credo, 나는 믿습니다

창의적 사랑실천의 세계를

오늘은 남들이 잘 안하는 이야기를 좀 하려 한다. ‘종교’에 관한 이야기다. 보통 대화자리에서 정치, 종교 이야기 하지 말라고 한다. 개개인의 깊은 신념과 개인적인 경험이 결부된 이야기이므로 쉽게 상처를 주고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정치고 종교고 서로가 진지한 경험을 한 시간이 길고, ‘당신도 옳습니다’라고 할 수 있는 관용의 정신에 합의하면 얼마든지 이야기할 수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경험이 길수록 세상사 누군 백 퍼센트 선인이고 누군 백 퍼센트 악인이고, 그런 게 없이 결국 인간사 다 거기서 거기고 똑같다는 걸 깨닫기 때문이다. 세상과 떨어져서 세상을 관조하며 사는 천주교 수도자들이나 사제가 불교의 스님과 공감할 수 있는 건 그런 까닭이다.


내 경력의 상당 부분이 한때 종교와 관련된 것이었고, 그 종교에서 나름 전문가의 위치에 이르러봤기 때문에, 나는 어쨌든 종교와 관련된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다. 물론 그것은 전도나 선교가 아니라 비평에 가까운 이야기일테다. 이러저러하게 불편하실 분들께 미리 양해를 구한다.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보는 것만큼 편리한 게 없다. 여남, 흑백, 선악, 진보보수 등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편의상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 보수냐 진보냐를 나눠 이야기하기로 한다. 보통은 ‘신학적으로 진보냐 보수냐’고 묻는다.


예컨대, 지구가 성경 문자대로 6일만에 창조됐다고 믿는 것이 보수, 빅뱅이나 진화론을 인정하면서 그래도 신의 계획 안에 있는 일이었다고 세속 학문을 수용하는 것이 진보다. 보수는 성경에는 남자 여자만 나오고 동성애도 반대하니 그것만이 진리다라고 말하고 진보는 아니다, 그건 성경이 쓰일 당시에는 동성애, 트랜스젠더, 무성, 간성 등 다양한 인간 존재양식을 몰랐다라고 말하는 식이다.


그럼 나는 뭐냐. 나는 진보다. 깊이 공부해보니 진보가 맞길래 진보라고 믿는다. 그렇지만 나는 보수신앙에서 출발해 진보에 이른 경우다. 원래부터 진보신앙이었던 이들과는 좀 다른 면이 있다. 공부하다 읽은 책에, 미국에서 진보신앙을 가진 이들은 개인사를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고 한다. 신의 계획은 더 원대한 것에 맞춰져 있기에, 개개인들의 사사로운 청원으로 그 계획이 어그러지면 안 된다고 믿는다.


나는 그보다는 신이 사소한 것들에도 응답할 수 있고 기적도 행할 수도 있는 인격신이라고 믿는다. 그러면서 개인 기복신앙은 비판적으로 수용하니, 보수도 진보도 아닌, 융합적 신앙이랄 수 있다. 진보는 인간사를 현실적으로 본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기복신앙도 인간현상의 한 부분일 수 밖에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 더욱 현실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종교인이라면 보수는 죄인됨을 가르치려들고 진보는 ‘정치적 정의’(political correctness)를 가르치려 든다. 하지만 나는 소위 ‘PC함’이 지향하는 변혁되는 세상에는 동의하지만, 거기에 이르는 길이 그저 소수 엘리트들이나 이해하는 길, 반대편을 ‘무지’로 모는 길보다는, 반대편도 다 연유가 있고 합당한 사유가 있다, 공감하고 인정하는 길이길 바랄 뿐이다. 그래서 나는 성경을 근거로 동성애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이해한다. 성경에 그렇게 밖에 안 써 있는 걸 어떡하나. 그건 내 친구들인 보수신앙인들도 거부감없이 진보신앙에 열려, 균형잡힌 신앙이 되기를 바라기 때문에 닫지 않고 열어두려는 길이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 세상을 절망으로 이끄는 것은 뭐든 원리주의, 근본주의가 되는 것이기에, 나는 늘 변화와 유연성을 추동하고 거기에 이르는 생각과 영혼의 ‘여정(journey)’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렇게해서, 뭐든 맹목적이기보다는 ‘사려깊은 신앙’이 되기를 바란다.


보수신앙인은 ‘사랑 실천’이라는 종교의 대의를 이해할 때,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고 성경에 씌여있으니 빈국에 가서 당장 물을 주고 빵을 나눠줘서 교회로 모이게 하자는 식이고 진보신앙인은 성경은 노예제도도 인정했었다며 보다 본질적인 구조 변혁을 통해 비신자들도 유익을 얻도록 해야한다는 식이다. 둘다 일장일단이 있다. 전자는 그렇게 해서 교세확장이 쉬운 반면, 후자는 일은 많이 하는데 교회는 크질 않는다. 그러니 정답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보통, 어떤 사람이 매우 종교에 독실한 사람,이라고 하면 의당 그 사람이 보수적일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독실하기에 진보적이라면 어떨까? 독실하기에 자기 종교만 생각하지 않고 공동선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나는 그게 예수의 원신앙이었다고 본다. 예수는 자기 종교 전통의 경전의 일점일획에도 충실한 사람이었지만, 그랬기에 손가락이 아닌,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을 볼 수 있었던 사람이다. 경전의 문자 준수에 매달리는 게 아니라, 경전에서 이르지 않은 것까지도 생각해내서 실천할 수 있는, 경전을 뛰어넘는 파격적 변혁가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받아 보편종교를 이루었다고 생각한다.


그랬기에 그는 안식일 규례를 일부러 깨보이면서 병든 사람을 고쳐주고 어린아이와 과부들, 성매매 여성을 환대하며 죄인과 매국노까지 자신의 식탁에 불러들여 ‘먹보에 술꾼’이라는 비방까지 받은 것이었다. 그는 경전을 충실히 따른 끝에 경전이 가리키는 ‘무조건적인 사랑실천’을 보고 창의적인 실천을 할 수 있던 사상가였다. 나는 그 창의성이 없는 종교, 교조적이고 수동적이며 경전주의적인 종교가 종교본연의 목적인 사랑실천을 종교간 전쟁으로 바꾸는 원리주의, 근본주의 종교가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독실해서 창의적인 사람,’ 보수에 천착하다보니 진보가 되어버린 사람을 볼 수 있을까? 나는 거기에 인류의 희망이 있다고 믿는다. 그게 내 개똥신학이고 신앙이다. 나는 믿는다, Credo.




사진- 픽사베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