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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inrich May 16. 2022

아마존을 떠나며 (2)

회의 (feat. 노 파워포인트)

처음 의도는 워라밸이나 연봉과 같은 이야기를 더 하려고 했었는데, 특별한 제약 없이 인상적이었던 부분을 모두 다루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아마존은 내부에서 파워포인트로 회의자료를 작성하지 않는다. 거의 대부분의 회의에서 진행자는 워드 문서를 준비하는데, 디자인 리뷰 정도를 제외하면 문서는 반드시 6페이지 이내로 준비한다. 문서에 표나 차트, 심지어 아이템화 된 항목을 넣는 것은 ‘권장’되지 않고, 말 그대로 ‘줄글’로 설명하는 것이 기본이다. 표나 차트는 부록으로 덧붙일 수 있는데, 높은 자리에 계신 분들은 부록을 잘 보지 않는다. 결국 ‘줄글’로 이해가 잘 되도록 설명을 해야 한다.


회의 자료를 이렇게 준비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 하나는 글 쓴 사람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와 그 논리가 명확하지 않으면 이해하기 쉬운 ‘내러티브’를 만들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글을 쓰는 과정에서 스스로도 문제를 더 잘 이해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파워포인트 없다고 하면 편할 것 같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았는데… 글쓰기에 소질이 있었던 분들이 아니라면 문서 작성이 결코 쉽지 않다. 화려한 문체는 지양되고, 간단명료하고 직접적인 표현들만 사용하면서 읽기 쉽게 작성해야 한다. 처음 작성한 자료는 빨간펜 선생님 만난 것처럼 엄청난 첨삭을 받았다. 대학교 졸업하고 처음으로 글쓰기에 대한 책을 꽤나 많이 읽어야만 했었다.


시니어 매니저나 디렉터들은 이런 문서 작성을 많이 하셔서 그런지 글을 매우 잘 쓰시는 분들이 많다. 그분들이 VP 보고용으로 쓰신 문서들을 보면서 정말 많이 배웠다. 아직도 그분들이 작성하신 자료에 비하면 너무 창피하지만.


회의 진행도 좀 다른데, 대부분의 회의는 시작하면 문서를 공유하고 20분 내외로 조용히 읽기만 한다. 작성자가 개요를 잡아주거나 하는 것도 없다. 그래서 문서에는 항상 전체 맥락과 논의하고자 하는 문제가 명확하게 정의되어 있어야 한다. 문서의 퀄리티가 매우 중요한 이유이기도 한데, 회의 참여자의 이해도가 조금씩 다른 경우, 이 20분 안에 생산적인 토론이 가능할 정도로 모두에게 전체 상황을 이해시킬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문서 작성이 서툰 사람이 자료를 준비한 경우 제대로 된 논의도 못하고 맥락에 대한 질문만 하다가 끝나는 회의도 여럿 있었다.


간혹 자료를 미리 읽고 오라고 하는 회의도 있는데 이것도 권장되지 않는다. 회의 시간 동안 자료를 읽는 이유는 미리 읽고 오라고 하면 ‘아무도 안 읽었으면서 읽은 척하기 때문’이란다. 이건 전사적인 지침이기 때문에 미리 읽고 오라는 경우는 제한적이다.


사실 나는 문서 작성도 힘들었지만, 잘 모르는 컨텍스트를 20분 만에 읽고 이해하고 좋은 질문을 하는 것도 너무 힘들었다. 역할상 잘 모르는 분야의 회의도 많이 들어가야 했지만, 그 자료를 작성하는 사람이 매니저 급이 아닌 경우가 많아서 읽기 힘든 경우도 많았고. 문서 작성도 남들의 두세배 시간을 투자해야 했지만 그래도 업무 시간 외에라도 따로 할 수 있는 일이라 부담은 덜 했던 반면, 다른 사람이 작성한 문서를 20분 만에 다 읽는 것은 오히려 시험 보는 기분에 가까운 적도 많았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아마존의 회의 문화가 매우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회사는 예전의 평범했던 회사들과 유사한데 아마존에서의 회의가 훨씬 생산적이었다는 느낌이다. 다만 저런 독특한 회의 문화는 일부 팀의 의지로 변화를 주기는 어렵고, 전사적으로 지침이 주어져야 가능한 일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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