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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B Sep 05. 2023

삼촌과 할머니, 냉이 된장찌개

    학교를 들어가기 바로 전, 할머니와 엄마로부터 봄을 맞이하는 법을 배웠다.


    1993년 봄은 새로운 것들을 많이 알게 된 해였다. 초등학교에서 처음 보는 아이들과 친구가 되는 법, 제자리에 앉아있는 법을 배웠다. 봄에 먹는 새로운 음식들도 알게 되었다. 낯선 것들을 마주하면 늘 긴장하던 나는 우리 집에 잠깐 온 할머니가 그리도 반가웠다.


    막내 외삼촌네에서 온 할머니와 같이 엄마의 손을 잡고 동네의 이름 모를 밭으로 나갔다. 내가 모르는 낯선 풀들이 가득했다. 쭈그리고 앉아서 엄마한테 갓 배운 엉성한 호미질로 흙을 들추어내었다. 민들레 잎을 닮은, 어떻게 보면 톱니바퀴를 따라 그린 듯한 이름 모를 풀을 캐내었다. 엄마는 그게 그냥 풀이 아니라 냉이라고 가르쳐줬다. 엄마가 갓 캐낸 냉이를 털어서 내 코에 갖다 대주었다.


    “이게 냉이야. 냄새 맡아봐”


    코 끝에 전해오는 희한한 풀냄새는 태어나서 처음 맡아보는 것이었다. 낯설어도 자꾸 끌리는 향이었다. 엄마가 따로 말해주지 않아도 이게 봄의 향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가 한가롭게 냉이향을 맡고 있는 사이에, 할머니와 엄마는 바쁘게 손을 놀려 빨간 플라스틱 바구니에 푸릇한 냉이뿌리를 산처럼 쌓아두고 있었다. 나는 별생각 없이 몇 뿌리를 느릿느릿 캐었는데도 엄마는 잘했다고 칭찬해 주었다.

 

    엄마랑 할머니가 한나절동안 캤던 냉이는 막내 삼촌을 위한 선물이었다. 엄마는 주방에서 뿌리를 다듬은 냉이에 참기름과 깨를 뿌리고 고추장으로 버무려서 냉이무침을 해주었다. 동시에 된장찌개를 한소끔 끓이면서 마지막에 손질한 냉이를 뿌리째 넣었다. 어린 나에게는 계란과 소시지가 더 맛있었지만 엄마가 처음 만들어 준 냉이된장찌개는 입맛 까다로운 어린이에게도 매우 맛있었다.


    할머니와 엄마, 막내외삼촌과 막내 외숙모 사이에 끼어서 천천히 밥을 먹던 유일한 어린이인 나는 봄날을 가족들과 함께 먹었던 것 같다. 봄을 느끼는 것은 직접 캐온 봄나물을 가족들과 나눠먹는 것이라는 것을 배웠다. 엄마와 할머니에게는 언제나 나처럼 어린아이였을 막냇삼촌은 그저 맛있다고만 했다. 한나절 준비한 냉이의 주인공인 삼촌의 맛있다는 말 한마디 만으로도 할머니와 엄마는 기뻐했다. 그 밥상에서 여덟 살의 어린이와 성인인 막냇삼촌 모두 가족의 사랑을 받기만 하는 아이일 뿐이었다.


    봄날의 냉이를 먹고도, 나에게 삼겹살을 구워주고도 삼촌은 마당에서 자주 담배를 피웠다. 기침을 유난히 오래 하기도 했다. 몇 년 후, 삼촌이 갑자기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의식이 없다는 삼촌은 중환자실에 처음 보는 얼굴을 하고 삼촌 덩치보다 큰 기계들 옆에서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삼촌은 꽤 수다쟁이였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한 달 동안 가족 모두 기적을 바라고 있었지만 삼촌은 여전히 호흡기를 물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할머니는 중환자실 대기실에서 하루 두 번, 아침 10시와 저녁 8시 면회를 들어가기 위해서 계속 지내고 있었다. 나야 손에 꼽을 정도로 삼촌을 가끔 보았지만 할머니는 간호사들이 입는 청록색 면회복을 꼭꼭 입고 아들을 매일 돌보았다. 그렇게 5년이 지났다.


    할머니가 사십이 넘어서 얻은 막둥이라서 더 그랬을까? 할머니는 아들을 지키기 위해 아플 새가 없었던 것 같다. 할머니는 그새 팔십 대 초반이 되었어도 첫째 아들 집에서 매일 병원에 있는 막둥이에게 꼬박꼬박 다녀왔다. 버스를 타고 꼬박꼬박 병원에 도착하는 발걸음은 늘 한결같이 중환자실로 향했다. 할머니는 힘들다는 말 한마디 없이 꿋꿋하게 막내 곁을 지켰다. 어느 해 겨울에는 할머니가 입은 잠바의 주머니에 편지가 들어있었다. 중환자실 간호사 언니는 할머니를 볼 때마다 엄마 생각이 난다고 적혀 있었다.


     중학생이 된 어느 늦봄에 갑자기 삼촌은 우리를 떠나버렸다. 5년이 넘는 시간 동안에 나는 삼촌 대신에 냉이된장찌개를 독차지했다. 미안한 마음에 삼촌을 떠나보내는 장례식장에서 많이 울었다. 너무 오래 울고 있는 탓에 빨리 집에 돌아가야 했다. 할머니는 나와는 반대로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렇게 아끼던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야 하는 아픔을 사람들에게 드러내지 않았다.


    몇 년 후에 할머니랑 엄마랑 같이 시장에서 점심을 먹었다. 시장에서 많은 사람들을 보고 난 후에 할머니는 집에서 엄마 모르게 나에게만 살짝 말했다.

   

     “젊은 청년 뒷모습만 보면 다 너 막내 외삼촌 같아”


    할머니는 십 수년이 흘렀어도 막내아들을 떠나보내지 못했다. 막둥이와 비슷한 뒷모습을 보더라도 그 누군가가 뒤돌아선 모습은 철없는 막내가 아닐 것이다. 나는 할머니가 아들을 잊고 강하게만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실은 매일 마음속에 그리움을 남모르게 삭혀내고 있었던 것이다. 엄마와 할머니와 나는 삼촌 이야기를 자주 하지는 않았는데 우리는 서로 말없이 마음 한구석에 삼촌을 계속 그리워하고 있다.


    삼촌은 나에게 맛있는 음식들을 소개했다. 고시촌 근처에 살던 삼촌 덕분에 닭갈비를 좋아하게 되었다. 엄마랑 나는 가끔 외식으로 닭갈비를 즐겨 먹는다. 달달한 커피빵을 우유에 살짝 적셔 먹는 것도 삼촌이 알려준 것이다. 나는 가끔 빵을 우유에 찍어 먹으면서 삼촌 생각을 한다. 삼촌은 가족들을 위해 언제나 삼겹살을 구웠다. 태우지 않으면서 바삭하게 굽는 삼촌의 고기는 아직도 생각이 난다. 나는 삼겹살의 말캉한 비계를 먹기 싫어했다. 삼촌은 자기도 어렸을 때는 비계를 안 먹었는데 어른이 되어서는 비계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했다. 까다로운 입맛을 가진 조카는 삼촌처럼 어른이 되었지만 여전히 비계를 먹지 못하고 있다.          


    올해 봄은 더욱 냉이된장찌개 생각이 난다. 나는 그새 삼촌과 동갑이 되었다. 올해는 공평하게 삼촌도 나도 냉이를 먹지 못한다. 바게트를 주식으로 삼는 나라의 유학생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곳 시장에는 냉이가 없다. 아시안 마트에서 콩나물과 팽이나물을 구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 나라는 봄의 향기를 담은 냉이를 모른다. 삼촌에게 버터 향이 물씬 나는 따뜻한 크로와상을 자랑하고 싶다. 커피빵을 알려준 보답으로 말이다. 그래도 봄을 맞이하기에는 냉이 된장찌개만 한 것이 없다. 늦봄이 생일인 삼촌과 매년 봄을 맞이했으면 나도 엄마도 할머니도 모두 더 많이 웃었을 것이다. 그리고 막내 외삼촌이 서서히 잊혀질 즈음, 올해 봄날이 지날 무렵에 할머니도 영영 냉이된장찌개를 못 먹게 되었다. 이제는 호미를 가지고 냉이를 혼자서 캘 수도 있고, 냉이된장찌개를 맛있게 끓이는 법도 알고 있다. 여덟 살의 봄처럼 냉이된장찌개로 삼촌과 할머니 사이에서 봄날을 같이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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