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틀리에(Atelier)는 프랑스어로 예술가의 작업장을 뜻하기도 하고 또한 예술가가 여는 도제 수업을 말하기도 한다. 프랑스에서는 예술 활동을 체험할 수 있는 아틀리에가 박물관, 미술관, 도서관, 음악당 등 곳곳에서 많이 열린다. 대부분은 아이들을 위해 열린다.
프랑스에서 제법 살아본 것 같지만 내가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에는 의외로 제약이 꽤 있다. 그동안 학교에서 프랑스어로 글을 쓰고 질문과 대답을 이어가면서 구술로 시험을 보는 것도 해냈지만(그리 좋은 점수는 아니다) 의외로 어려운 것은 프랑스인들처럼 영화를 보고 자연스럽게 웃는 것, 감정을 표출하고 느끼는 것이다.
글을 이해하는 것은 사전을 참고하거나 인공지능 번역 사이트 디플과 함께라면 무섭지 않다.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 나오는 다미엥서의 공개 처형을 이해하는 것은 차라리 낫다. 파리의 한 영화관에서 공포영화를 보며 다른 관객들처럼 무서워할 수 있을까? 머리로는 계속 프랑스어 문장을 해석하면서 공포감을 동시에 느끼는 것은 시차가 발생한다. 티모시 살라메가 주연하는 <웡카>의 유머코드를 모국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고스란히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게다가 빠른 말도 주문처럼 외우는 프랑스 성우의 대사를 이해하기 위해 애쓰는 것도 내게는 또 다른 공포다.
외국어로 새로운 분야를 배운다는 것은 내게는 매우 큰 도전이다. 영화관에 쉽게 갈 수 없는 나는 차라리 말이 별로 필요 없는 활동을 찾아보고 싶었다. 파리 필하모닉에 오케스트라 콘서트에 몇 번 간 이후로 음악이나 미술 같은 예술이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 사람의 감정을 직접 와닿을 수 있다는 장점을 알게 된 후 새로운 것을 배워보고 싶었다.
마침 파리 국립도서관 전시물을 보다가 파리 오페라 근처에 위치한 리슐리외 도서관에서 아이들이 아닌 어른들을 위한 판화 아틀리에가 열린다고 해서 얼떨결에 신청을 했다. 거기서 조용히 구석에 앉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그림을 그리고 중학교 때 했던 것처럼 대충 선을 중심으로 파내면 되지 않을까 기대했다.
나는 처음 무언가를 시작하는 것을 매우 무서워해서 도서관 입구에 도착하기 전까지도 괜히 호기를 부려서 신청했다고 궁시렁거렸다. 입구 직원에게 물으니 판화 아틀리에 참가자들은 서점 앞에서 모인다고 안내를 해주었다. 아틀리에를 안내하는 사서 분은 도서관에 근무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온화한 미소로 인사를 해주었다. 나는 참가자들 중에 유일하게 뚜렷이 외국인으로 보이는 사람이었다. 8명 중 동양인은 나뿐이었다.
사서는 내게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판화를 해본 경험이 있냐고 물었다. 나는 '중학교 때 학교에서 해본 적이 있다'고 말하면서 손으로 도구를 잡고 파내는 제스처로 말을 멈추었다.
참가자들을 이끌고 사서는 도서관 직원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공간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프랑스어로 각 도구에 대한 설명과 해야 할 일을 이해하는 것은 생각보다는 무섭지 않았다. 우선 우리가 할 것은 고무판을 가지고 작업하는 것이다. 학교 다니면서 누구나 해볼 법한 지우개 파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서는 견본 그림을 세 가지 정도 보여주었는데, 표범과 얼룩말, 그리고 나무 위에 올라간 새가 있었다. 판화는 단순히 한 가지 색깔로만 인쇄하는 것이 아니라 2도 인쇄처럼 모노타입(monotype)으로 인쇄하는 것도 있었는데 나는 호랑이를 주제로 해보고 싶었다. 빨간색으로 호랑이의 피부를 표현하고 검은색 선으로 굵게 호랑이의 얼굴과 줄무늬를 표현하면 꽤 멋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이유 모를 예술에 대한 고집이 생겨서 사서가 두 번 넘게 만류했는데도 내 그림을 끝까지 고집했다. 호랑이를 그려본 적은 없기에 핀터레스트에서 참고할 그림을 찾았다. 3차원의 각진 호랑이 그림을 시도했는데 대칭을 손으로 맞추기가 어려워서 호랑이의 정면 얼굴은 피하고 옆면만 그리기로 했다. 그래서 3차원의 각진 느낌을 가지고 내가 새로 그린 그림을 그리니 다른 참가자들보다 꽤 늦었다.
트레이싱지에 2B 연필로 호랑이 그림을 그리고 고무판에 크기와 형태를 맞추어서 트레이싱지를 골고루 문지르면 1단계는 끝이었다. 그림은 만족스러웠지만 시간이 늦어서 선생님이 염려한 이유를 잘 알 것 같았다. 대신에 도구를 가지고 빨리 호랑이의 몸과 얼굴의 덩어리를 파내었다. 이 부분은 빨간색으로 일차 인쇄를 할 것이었다. 도구와 방법도 설명을 들었는데 정확히 기억은 못하지만 대충 주의사항은 알아들은 것 같았다.
정해진 곳에 가서 두꺼운 도화지에 고무판을 맞추고 빨간 부분을 인쇄했다. 먼저 고무 가루가 묻지 않도록 깨끗이 먼지를 다 털고 물에 씻어내어 바닥에 빨간 잉크를 고르게 펴야 했다. 그다음에 고무판에 잉크가 고루 묻게끔 또 다른 도구로 종이 위를 고루 문질렀다. 사용법은 알지만 도구의 이름은 정확히 모른 채로였다. 빨간색 호랑이의 머리와 몸이 생각보다 더 잘 찍혀 나왔다.
두 번째로는 이제 검은색 잉크로 호랑이의 줄무늬와 배경을 조금 파내는 일이었는데 조금 복잡해서인지 그림과는 다르게 선을 잘못 팠다. 내가 인쇄하고 싶지 않은 부분은 잉크가 묻지 않을 곳이라 많이 파내야 했는데 하다 보니 어디가 파야할 곳이고 어디가 건드리지 말아야 할 곳인지 헷갈려서 호랑이의 무늬가 생각보다 얇아지긴 했다. 배경에 공간감을 주기 위해 약간의 선도 추가했는데 이것은 딱히 계획하지 않은 부분이라 자유롭게 파내었다. 프랑스어로 애써 말할 필요가 없어서 몰입이 더 쉬웠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검은 잉크를 고무판에 덧입히니 내가 좋아하는 화풍이 나왔다. 조금 강렬한 호랑이의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고무판 자체도 꽤 마음에 들었다. 세 번 인쇄했는데 인쇄물은 똑바로 나오기보다는 약간 겹쳐 나오는 경우도 있어서 미국 팝아트 같이 조악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꽤 재밌는 것 같았다. 나도 나에 대해서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언어의 장벽을 뚫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고집부려서 해내니 많이 뿌듯했다.
중간에 많이 서두른 탓에 다른 사람들과 비슷하게 작업을 마칠 수 있었다. 서로 칭찬해 주고 재밌다고 해서 더 좋았던 것 같다. 선생님도 걱정한 것에 비해 괜찮게 나와서 마지막에는 진심으로 오래 칭찬해 주었다. 말길이와 어조에 따라서 프랑스어 칭찬이 진짜인지 아닌지 감별하는 능력도 지금은 생겼다.
오랜만에 판화 수업을 한다는 사서 선생님 덕분에 꼼꼼하게 설명을 듣고 리슐리외(richelieu)에 있는 박물관에서 판화 전시물에 대한 소개와 작업 방식도 많이 들어서 3시간의 아틀리에 수업은 4시간이 되었다. 집에서 잘 안 써지는 논문으로 시름하다가 공예를 하면서 몰입하니 오케스트라 콘서트 들은 것처럼 마음도 후련하고 성취감도 느껴서 좋은 하루였다. 내가 한 판화가 마음에 들어서 프낙(Fnac)에 가서 책갈피도 스무 개 정도 만들었다. 감각을 새로이 할 수 있고 기분이 좋아진다면 내게 이것이 예술인 것 같다.
프랑스 영화관은 머뭇거려지는 장소지만 도서관의 아틀리에는 이제 무섭지 않다. 앞으로도 계속 새롭게 배울 예정이다. 다음 목표는 파리 필하모닉의 음악 아틀리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