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긴 회사 생활을 마무리하고
크고 작은 지역 행사를 맡아서 하는 기획사에서
일을 하고 계시는 국장님을 만났다.
당시 회사 사업팀에선 한글날을 맞아
그 기획사와 함께 행사를 하나 준비하고 있었고
나는 개막식과 음악회를 맡아
기획사 대표를 만나러 간 것이었는데
그곳에서 오랜만에 국장님을 뵙게 됐다.
국장님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한글날 행사에만 참여를 하고 계셨는데
오랜만에 뵙는 국장님께 인사를 드렸더니
느닷없이 뾰족한 말이 흉기처럼 날아들었다.
“니도 이제 늙어가네”
“국장님도 얼굴이 안 좋아 보이시네요
운동해야겠어요 국장님도 저도요 “
이렇게 받아쳤어야 했다.
그래야 그날 하루를 망치지 않고
지금까지 이렇게 마음에 각인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면 크게 호들갑을 떨면서
“국장님 얼굴에는 저승꽃도 피셨네요” 말하고
저 여자 미쳤네 소리를 들어도 좋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는 한없이 추락하는 기분을
주체할 수 없이 그저 회의 내내 ‘나쁜 국장님’과
‘늙어가고 있는 나‘ 생각에 사로잡혔다.
‘저 인간은 왜 저럴까’
‘나랑 친하지도 않았잖아’
‘기미를 관리했어야 했는데...’
‘그냥 인사할걸, 괜히 반가운 척했어 ‘
일상 테두리에 들어와 있지 않은 사람을 만날 때는
한층 말조심을 해야 한다.
고백하건대 나도 국장님과 다르지 않았던 적이 있다.
일 년에 많이 봐야 한 두 번 마주치는 회사 선배와
짧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보이는 대로
“어, 흰 머리카락이 많이 생겼네요”라고 했다.
멱살잡이. 선배의 멱살을 잡은 것이다.
느슨한 관계에서는 걱정과 위로도 독이 된다.
‘너 왜 이렇게 야위었어?’는
‘나는 건강해’라는 같잖은 걱정이고
‘요즘 얼굴이 안 좋아 보이네’는
‘나는 살만해’라는 얄팍한 위로이다.
삶에서 실패는 없다. 모두 경험이 되고 지혜가 된다.
10년이 된 차를 보내고 새 차를 타고
하이패스 길로 들어섰는데
요금소에서 정산이 되지 않았다는 사이렌과 함께
톨게이트를 지나치고 말았다.
그래서 집으로 오는 길에 요금소 길로 가서
작은 창문을 열고 있는 직원에게
상황을 설명하곤 통행료를 지불해야 한다고 했다.
그랬더니 직원은 하이패스가 어디 있냐고 물었다.
나는 차를 바꾼 지 얼마 되지 않아
하이패스 단말기를 찾느라 한참을 헤맸다.
다행히 꼬리에 차는 없었지만
상대가 기다리고 있어 진땀이 나기 시작했다.
직원은 짜증이 난 듯
“위에 있잖아요. 백미러 위에.
머리 위에 머리 위에“ 라며 큰 소리를 냈다.
마치 잘못을 저지른 아이를
애정 없이 나무라는 듯했다.
또다시 뾰족한 흉기.
이번에는 주저앉지 않고 반격했다.
담백하게 그리고 너 그러지 말라는 어투로
“그런데 선생님 왜 화를 내세요?
그러시니까 제가 마음이 불편합니다”
그러자 직원은 화를 낸 적이 없었다면서도
목소리는 수그러들었고
얼굴에는 미안한 기색이 비쳤다.
하이패스는 백미러 위가 아닌
조수석 앞 글로브박스 부근에 있었고
뒷자리에 계셨던 엄마에게도 면이 섰다.
‘엄마, 엄마 딸,
이리저리 처맞고 다니지만은 않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