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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밀 Nov 10. 2024

[나긋한 상사와 입 발린 소리하는 사회인]

매월 마지막 화요일을 기점으로

그전 주 화요일에는 라디오 회의가 있다.

방송 시간이 끝나면 바로 퇴근하는 개꿀 시스템은

같은 회사를 다녀도 회사 동료를

한평생 안 볼 수 있는

최고의 근무 환경을 동반하는데,

예를 들면 라디오가 마치는

낮 12시에 바로 퇴근을 하면

오후 네 시에 시작하는 라디오 디제이나,

저녁 뉴스를 하는 TV아나운서를

개인적으로 약속을 하지 않거나,

특집 프로그램으로 엮이지 않는 이상

좀처럼 만날 수가 없다.

때문에 한 달에 한번 하는 회의는

각자도생 프리랜서 진행자와 제작진들의

얼굴이나 보고 식사나 하면서

얕게나마 유대관계를 부여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한 달에 한번 회의라고 해봐야 특별한 내용은 없다.

회사가 정한 개편 시기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기존 코너가 말라빠진 녹차 티백이 될 때쯤

바뀌곤 해서 별 달리 할 말도 없는데,

그럼에도 회의의 성격은 팀장에 따라 달라지곤 한다.

지금 B팀장은 ‘식사’를

신명조에서 고딕체로 바꾸는 스타일이다.

회사 주변보다는 조금 멀리 나가

맛있는 메뉴를 먹고, 근황을 나누고,

친밀감을 유지하는 반면

예전 A팀장은 ‘회의’에 방점을 찍었다.

낮 12시 점심을 먹으러 가기 전,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세 프로그램 디제이와 작가,

주말 녹음 방송을 하는

세 프로그램 진행자와 제작진까지

모두 10명이 5층 회의실로 모여든다.


분명 그리 할 말이 없는데도

회의실이라는 공간의 힘으로  

바뀌는 코너나 변동되는 게스트,

상품협찬 이야기가 오고 가고

그마저도 없을 때는

‘다음 달에는 변동사항 없습니다’로

마무리되곤 했는데,

마지막엔 팀장이 종종

회사 근황을 공식적으로 이야기해 주곤 했다.


이전을 준비하고 있는

회사는 언제쯤 움직일 수 있을 것 같고,

라디오 특집 프로그램 담당자에게

어느 정도 진행이

되고 있는지를 물어 같이 공유하고,

TV 쪽에서는 이번에 누가 상을 받았다 등의 이야기.

존중. 뿔뿔이 흩어져 있는

프리랜서들에게 회사 울타리를 상기시켜 주고

같은 일원으로 생각하는 존중으로 들렸다.


실은 A팀장을 그다지 곱지 않게 생각했다.

하늘과 땅을 구분 못한 채로

회사에서 천둥벌거숭이로 활동할 때,  

누군가에게 전해 들었던,

그가 어느 자리에서 나에게 했던 뒷담화.

“멍청해보이잖아, 보면 모르나”

기본적으로 틱틱거리는 말투와 기질에

할 말은 하는 성격인 데다

뭐 딱히 그 당시에 틀린 말은 아니어서

기분이 나쁘긴 했지만 상하진 않았다.

정수기 앞에서 만난,

지금은 퇴사한 사업국의 어느 팀장이

라디오 게스트로 출연하는 나에게

“김작가, 니는 사투리를 너무 많이 쓰더라”라고

했을 때 아 네 뭐 하면서 웃고는 있었지만

속으로 ‘뭔 개소리지’ 했던 그 정도였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회사의 쑥과 마늘을 먹으면서

천만다행으로

천둥벌거숭이에서 인간으로 사회화가 되면서   

그가 불쑥 “라디오는 니한테 말해야 된다며”라고

말할 때는 그간의 시간을

인정받는 것 같아 몹시 좋았고,

외부사람에게 무언가를 전달해 줘야 상황에

“아니다 내가 갈게.

퇴근길에 들리지 뭐”라고 할 때는

평소 다정하거나 부드러운 것과는

거리가 먼 그의 새로운 면모를 보기도 했다.


시간의 힘.

그도 나도 깎이고 잘리고 다듬어지면서

기세와 기운이 한 템포 느려지고 기울어진 덕분일까.

얼마 전, 황석희 번역가의 피드에서 본 문장.

영화 ‘While we’re young‘에 나오는 구절.

'나는 마흔넷이야.

못할 일들이 있고, 가질 수 없는 것들이 있는 나이'


얼마 전 출근길에 A팀장을 만났다.

오랜만에 만나 답답한 공기가

엘리베이터에 흐르고 있었는데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

“학원은 잘 되나?”

“뭐 네 2년 됐어요. 회사 열심히 다니겠습니다”

그는 틱틱대는 성질이 여전히 드러나지만

그래도 말을 먼저 걸어주는

나긋한 상사가 되어 가고 있었고,

나는 당장 내일 회사를 그만두더라도

입에 발린 소리를 하는 사회인이 되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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