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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밀 Nov 18. 2024

[ 지랄 단지 ]

작가의 꿈을 안고 아카데미를 다녔다.

대학교 4학년,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산 넘고 물 건너

동의대학교 부설 방송 아카데미

작가반에 등록해 부지런히 다녔는데

그때 특강을 하러 오셨던,

KBS 역사스페셜 작가님

(어렴풋이 성이 ‘추’였던 것만 기억이 난다.)의

말씀은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또렷이 남아 있다.

“방송 작가는 작가라 아니라 잡가입니다”


이보다 적확한 표현은 없다.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앞에 두고

머리를 쥐어뜯는 일 보다는

라디오와 TV 매체의 성격에 따라,

또 매일 하는 데일리 프로그램과

특집 프로그램에 따라

하는 일이 조금씩 다르지만

피디와 소통, 출연자 섭외,

촬영을 위한 구성안과 대본 쓰기, 자막 작업 등

일곱 가지 무지갯빛의 차고 넘치는 일들을

제한된 시간에 빨리 쳐내야 할 때가 대부분이다.


지금 ‘잡가’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바로 ‘상품’이다.

문자나 신청곡 그리고 퀴즈의 정답을

보내오는 청취자들에게 주는 바로 그 상품.

‘내 인생을 책으로 쓰면 수십 권이다’라는

흔한 말처럼

상품과 관련된 이야기는 화수분과 같다.

피하고 싶은 에피소드가

끊임없이 나오는 지랄 맞은 단지.


먼저 상품 협찬을 해주는 협찬처에서

곤란하게 일을 만드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피부관리실에서 내놓는

10만 원 1회 피부관리권은

‘10만 원’이라는 금액 자체가 모호하고

‘10만 원만큼만 ’ 받고 싶은데

막상 가면 이것저것(?)을 붙여

‘쌩돈’을 몇 만 원 더 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또 원래 참기름 두 개에 김 하나 세트를

협찬하기로 약속했던

참기름 가게 사장님이

알고 보니 참기름 하나, 김 하나 세트로

크기를 줄여 보내고 있어서

당황스러운 적도 있었는데,

이 일은 참기름 세트를 잘 받았다며

사진과 함께 문자 사연을 보낸

청취자 덕분에 알게 됐다.


또 무식해서 빚어낸 일도 있다.  

요가학원 한 달 이용권을

아무 생각 없이 협찬받았다가  

학원과 거리가 먼 동네에 사는 사람이거나

할아버지가 상품으로 받게 되면

선물이 아니라 종이 쓰레기를

정성스레 등기로 전달받게 된다는 걸 알게 됐다.  


그리고 가장 난처한 건

협찬처 가게가 망했을 때이다.

가게를 접게 될 것 같다고

사장님이 미리 연락을 주면 좋으련만,

그러면 그 시점부터

상품 발송을 안 할 텐데,

예를 들어

'갔더니 감자탕 집이 문을 닫았던데요’라는

청취자 문자 사연으로

영업 중단 사실을 알게 되면

오른쪽 뒷목 어딘가가

한 줄기 솟구치며 바짝 당겨지게 된다.  

기껏 시간을 내서 찾아간

청취자에게 미안하고,

한바탕 하소연을 하고 싶지만

망한 사장님을 생각하니 그러지 못하고,  

이미 식사권을 발송한

다른 청취자들에게

일일이 연락해서 사정을 말하고

다른 상품권으로 교환을 해줘야 하니까

이 부분에서 가장 미치고 팔짝 뛰는 것이다.


거기다 상품을 받은 청취자들의 항의는

한층 더 오색빛깔로 찬란하고 다양하다.

집과 멀어서 혹은

다른 지역에 사는데 다른 상품으로 줄 순 없나,

가니까 돈을 더 내라고 하더라,

지난번에 받았던 상품인데 다른 걸 달라,

(프랜차이즈 업체의 경우)

내가 갔던 가게는

이런 거 안 받는다고 하더라 까지

결론은 다른 상품으로

바꿔달라는 것으로 동일하지만

저마다의 사연은 제각각이다.


이 수많은 항의 중에

매달 상품 정리를 하면서 종종 생각나고,

마음에 오롯이 새겨진 일이 하나 있다.

한 남성 청취자가

상품 수령을 하러 갔는데

기분이 나빴다는 내용을

라디오 문자창을 통해 보내왔다.

대형마트에서 파는

치킨과 피자가 당첨이 됐고,

상품권에 적힌 담당자에게

하루 전날에만 연락하면

4만 원 상당의 치킨과 피자를

가져올 수 있는 상품권이었는데,

아내와 함께 상품을 가지러 간 날,

담당자가 무시를 하더라는 것이다.  


문자창을 보고 전화를 했고

불편한 목소리로

자세한 상황을 들어볼 수 있었다.

대부분의 대형마트가 그러하듯이

치킨과 피자가 있는 곳이면

초밥이나 샌드위치 등이 보였을 테고,

그래서 혹시 치킨과 피자가 아닌

다른 것으로 가져가면

안 되냐고 물어봤다고 한다.

그저 막무가내로 다른 걸 가져가겠다고 아니고

‘물어만’ 봤을 뿐인데

그 담당자는 상품권에 나와 있는 대로

치킨과 피자만 가져가야 된다고 말했단다.

그런데 청취자가 기분이 상한 건,

그 담당자가

마치 돈이 없는 사람처럼 무시를 했고,

‘이것 가져가세요’가 아닌

‘이거나 가져가’라는 말투와 표정이었다는 것이다.  

 

뒷목.

나는 언제까지

죄송하다는 말을 해야 할까.

내가 죄송한 일도 아닌데.

그런데 내 월급에

죄송하다는 말도 포함돼 있는 거겠지.

“죄송합니다.

저라도 마음이 상하고 어쩌고저쩌고,

그 담당자분이

그럴 분이 아닌 어쩌고저쩌고,

다른 상품으로 바꿔 어쩌고저쩌고,

담당자에게 연락을 해서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  


그런데 전화를 끊고 나서 얼마 뒤쯤

휴대전화로 문자 한 통이 들어왔다.

상품 당첨 문자를

내 개인 휴대전화로 보내고 있는데

문자로 온 내용은 이랬다.

‘ 전화를 끊고 생각해 보니

저희가 지금 좋은 형편이 아니어서

그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안 좋았던 것 같아요.

여러모로 죄송합니다'


아. 오만가지 감정이 올라왔다.  

내 마음을 나도 모를 때가 많고,

심지어 여우의 신포도처럼

스스로의 마음을 속이기도 하는데,

이렇게 솔직하고 정직하게 이야기를 해주고,

순수하게 미안한 마음을 전해주고,

세상에는 선한 사람이 많다는 걸

알려줘서 울컥했다.

라디오 부스가 꼭대기 8층이라서

여러모로 좋다.

먼 산을 본다.

나이를 먹나 보다.


이렇게 상품과 관련된

다양한 에피소드는

시간의 힘을 빌어 교훈이 된다.

덕분에 요즘 상품정리는

가뿐하고 산뜻해졌다.

손톱만큼의 항의라도

들어올만한 건 받지 않고

키링 교환권 같은 기름값 아깝고,

가져오기 민망한 상품도 넣지 않는다.

대신 식사권이나 카페 이용권처럼

어린아이부터 어르신들까지

좋아할 만한 선물리스트를 채워 넣은지 꽤 됐고

주소 잘 써서 빨리 보내기만 하면 된다.

빨리. 지병인 게으름만 고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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