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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밀 Nov 24. 2024

[ 손글씨: 3초 그리고 3초]

손글씨를 모으고 있다. 요즘 낙.

시작은 신문 한 면을 차지하고 있던

스위스 출신의 큐레이터 인터뷰에서 시작됐다.

미술계 파워 1위 큐레이터,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Hans Ulrich Obrist).

영국 미술잡지 아트리뷰가 선정한

세계 미술계 파워 100인에

2009년과 2016년 1위에 오른 인물이다.

제법 긴 인터뷰에서 ‘손글씨’에 눈이 커졌다.

인스타그램에는 그가 만나는 사람들,

그러니까 작가, 시인, 건축가들의

손글씨가 올라오곤 한다.

손글씨 소멸에 저항하는 운동으로

작가 움베르코 에코를 만났을 때

손글씨가 점점 사라진다고 아쉬워한 게

머릿속에 남아 시작했다고 한다.

12년째. 인터뷰를 했던 기자 말대로

온라인 전시회인 것이다.

발견. 새로운 낙.  

한 주의 즐거움이었던

방송댄스를 그만둔 터였다.

몸치라는 한계를 1대 1 수업으로 메꾸고 있었는데,

본업이 여행사 대표이고,

아이 둘을 키우고 있던 강사는

수업 시간에 종종 아이들을 데리고 오더니

급기야 생업이 바빠지면서

수업 시간을 미루기 시작했고

그 횟수가 점점 늘어날 때쯤

‘다음 기회에‘ 를 먼저 제안을 했고

강사는 옳다구나 하고 오케이를 했다.


새 마음 새 뜻으로

인스타그램 부계정을 개설하고

쿠팡에 들어가 냉큼 사들인 포스트잇과

굴러다니는 펜들 중

다양한 굵기를 고려한 네임펜, 볼펜, 매직을  

이케아 지퍼백에 넣고 다니면서

손글씨를 써달라고 한다.  

한스 아저씨처럼

유명한 작가, 시인, 건축가들 대신

저마다의 세상에서

각자도생 하고 있는

주변 사람들에게 부탁을 하고 있다.  


이제 20여 개의 손글씨를 올리면서

재미있는 건 저마다 쓰는

메시지도 메시지이지만

다른 곳에서 포착된다.

3초 그리고 3초.

첫 번째 3초는

‘어쩌고 저쩌고 해서

손글씨 써줄 수 있어?’라고 했을 때의 반응.

이런 걸 뭐 하려 하느냐 라는 헛소리 유형과

인스타그램 팔로워 모아서 뭐 할 건데 라는

개소리 유형이 있는데

이럴 때는 친한 관계이지만

나와는 결이 다르구나를 느낀다.

반면 이제 고작 20여 명의 팔로워가 있는 곳에

포스트잇 나부랭이가 올라간다는 것보다는

정성스레 쓴 자신의 손글씨에

부등호 입을 크게 벌리는 유형이 있는데

이런 ‘부등호 류’들은

포스트잇을 가져간다고 하거나

다음에 써 오겠다고 한다.

아주 작은 것에도 성의를 다하는 모습은

다정하고 촉촉한 결심을 하게 한다.  

고마운 사람들. 내가 더 잘해야지.


그리고 두 번째 3초는

포스트잇에 손글씨를 쓰기 시작할 때의 3초다.

‘적어둔 게 있거든요’ 하며

휴대전화 메모장을 찾거나

‘뭐라고 쓰지요?’ ‘라며 난감해하면서

인터넷을 훑어보면서

뜸을 들이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바로 거침없이 쓰는 경우도 있다.

아무래도 펜을 잡자마자 써 내려가는 후자가  

손글씨 내용과 상관없이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

거기다 메시지까지 좋으면

호감 포인트는 한층 빨갛게 상승.

종이를 내밀었을 때

고민 없이 글을 쓴다는 건

평소에 생각을 정리하고 있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아쉬운 점도 있다.

행복, 건강, 사랑으로 메시지가 비슷하다.

삶에서 이보다 중요한 건 없지만

평소답지 않게 차분한 목소리로

잘 쓰지 않는 손글씨를

나름(?) 각 잡고 부탁을 하니까  

인생의 방향성이나 삶의 나침반 등

큰 의미로 생각하는 듯하다.  

손글씨를 쓰는 그 순간의 시간을

표현해도 좋을 텐데 말이다.

’오늘 한 끼도 못 먹었어요.

배고파요. 우리 밥은 먹고 다닙시다 ‘ 라든지

‘이틀 뒤 생일이에요.

이때껏 잘 버텨낸 나를 축하해 주세요’ 식으로

지극히 작고 소소하고

개인적인 사연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나라면 뭐라고 쓸까.

언젠가부터 손글씨를 부탁하면서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마음이 하나 있다.

‘나에게 말을 해주는 사람은 없을까?’

손글씨를 부탁한, 나를 향한 손글씨 말이다.

손톱 주변 거스러미 만큼의

애정을 담아준다면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어느 방명록에서 본 것인지,

아니면 어느 손글씨 대회에서 본 내용인지

기억은 엉클러져 있지만

그 내용만은 반짝이는 아이의 눈동자처럼

또렷한 글귀를 끄집어낼 것이다.

오로지 한 사람을 향한 마음.

‘글씨에는

그 사람의 기질과 성격이 담기기 마련이에요.

그런데 지금 이 글에는

오로지 당신을 향한 사랑과 응원만을 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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