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 가드닝 일기 - 나는 2년 차 가드너다
장미는 병해충도 많고 손도 많이 간다. 그래서 약도 쳐야 하고 줄기도 때마다 잘라줘야 하는 등 인위적인 관리가 필요하기 때문에 그라스와 야생화 위주의 '자연주의 정원'에는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장미를 거부하는 것은 가드너들의 자유다. 하지만 다양한 생김새와 향기를 품은 장미꽃을 실제로 만나게 되면 그 아름다움과 화려함에 끌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5월은 누가 뭐라 해도 장미의 계절이다. 우리 집 마당을 가득 채운 장미꽃을 날이 좋아서, 또 날이 좋지 않아서 마주 하고 있으면 장미 부정론자들의 잔소리, 장미 집사로서의 온갖 수발 등이 모두 보상받는 기분이다.
5월 초에 우리 집 마당에서 가장 먼저 개화를 시작한 첫 번째 장미 가든 에버스케이프는 5월 중순 최고의 순간을 보내고 있지만 여전히 새로운 꽃봉이 올라오고 있다. 꽃이 멈추지 않는 가든 에버스케이프는 끊임없이 꽃봉을 만들어 내며 가을이 끝날 때까지 피고 지고를 반복한다. 병해충도 거의 없고 우리나라의 더위와 추위에도 강한 특징 때문에 장미 입문자들에게 추천할 만한 장미다.
다음으로 개화한 장미는 퍼퓸 에버스케이프. 역시 에버로즈의 한국 장미다. 2022년 국제 장미대회에서 금상을 비롯해 4관왕을 수상한 이 장미의 진짜 매력은 꽃이 활짝 피고 2,3일이 지난 후의 모습이다. 퍼퓸의 첫인상은 쨍한 핑크빛에 큰 얼굴, 화려하지만 점잖은 우아함을 보여준다. 그러다 꽃이 익으면 장미가 아닌 모란이 연상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장미를 키웠더니 모란도 같이 보는 행운이라니! 여기에 퍼퓸 에버스케이프라는 이름에 걸맞게 정원을 채우는 상큼한 과일 향수의 향기까지. 퍼퓸 에버스케이도 가든 에버스케이프와 마찬가지로 병해충과 한국의 기후에 강하며 단단한 가지를 가지고 있는 등 장미 초보자들이 키우기에 적합한 장미다.
세 번째로 개화한 장미는 독일 장미 헤르초킨 크리스티아나다. 하얀 장미계의 거의 국민 장미급인 헤르초킨 크리스티아나는 순백의 하양에 딸기 우유를 한 방울 섞은 듯한 달콤하고 부드러운 크림 화이트의 색깔을 가지고 있다. 꽃이 피기 전 웅크리고 있는 모습은 달걀 또는 만두를 연상시키는 귀여운 통통함, 꽃이 열린 후에는 90여 장에 이르는 꽃잎이 한 장 한 장 겹쳐서 만들어 내는 신비하고 환상적인 레이스의 모양이 특징이다. 또 퍼퓸 에버스케이프에 뒤지지 않는 달콤하고 상쾌한 과일향까지. 하얀 장미를 하나 들이고 싶다면 추천 1순위의 장미.
독일 장미의 좌청룡 우백호라면 노발리스와 헤르초킨 크리스티아나다. 다음은 좌청룡, 보라 장미의 대명사인 노발리스가 개화했다. 날이 바짝 서 있는 듯한, 마치 고고한 중세 기사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꽃모양과 보라색의 어두운 색감 때문에 키우기도 어렵고 꽃인심도 박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사실 노발리스는 튼튼하고, 무럭무럭 잘 크고, 꽃도 많이 안겨 주는 스위트한 장미로, 잘 키우기만 한다면 나무처럼 거대하게 키울 수도 있는 순둥 한 장미다.
이렇게 5월을 장미의 계절로 만들어준 성공적인 장미가 있다면 실패한 장미도 있다. 먼저 퀸 오브 하트. 퀸 오브 하트는 지난겨울을 거치면서 알 수 없는 이유로 윗부분의 굵고 튼튼했던 가지들이 모두 말라 버렸다. 그래서 지난 4월 초에 밑동만 남기고 싹둑 잘라 버렸더니 이 녀석을 처음 데리고 올 때처럼 초기화가 되어 버렸다. 그 결과 올해는 겨우 몇 송이의 꽃만 개화. 그동안 퀸 오브 하트를 키워 본 경험으로는, 이 장미는 병해충도 꽤 있고 더위와 추위에도 약한 모습을 보이는 등 은근 약골인 데다, 장점이라고는 독특한 살몬 색감 하나뿐이었다. 추천하고 싶지 않은 장미.
다음 실패작은 덩굴장미 보니다. 올해 봄이 시작되자마자 기세 좋게 쭉쭉 뻗어 나가는 보니를 바라보며, 5월에는 우리 집 벽 위로 포도송이 같은 빈티지한 분홍색의 장미꽃이 주렁주렁 채워질 것이라는 기대감이 가득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랑 몇 송이만 개화. 초록의 잎과 진딧물만 가득한 너무 잘 자라기만 한 보니였다.
실패의 원인은 초봄에 진행했던 덩굴줄기의 유인 방법이었다. 최대한 수평으로 중심 줄기를 유인해서 꽃이 맺히는 새로운 가지를 만들어 냈어야 했는데, 중심 줄기가 30,40도의 각도로 위로 향하게 해서 잎가지만 만들어 낸 것이 문제였다. 보니는 5월에 꽃이 한 번 밖에 안 피는 한 철 장미이기 때문에, 다음 꽃을 보려면 내년 봄, 1년 후를 기다려야 한다.
우리 집의 마지막 장미 벨렌 슈필이 남았다. 이 녀석은 다른 장미들이 다 진 후 혼자 6월에 개화하는 장미다. 2022년 1년 차 때 달랑 세 송이, 2023년 2년 차 때 일곱 송이 밖에 안 피면서 덩치만 키웠다. 그러다 2024년 3년 차에 이르러서야 장미 다운 모습을 보여주며 꽃봉이 꽤 많이 달리고 있다. 그러니 포기하지 말고 키우면 벨렌 슈필은 보상해 준다.
5월은 장미의 계절이지만 사실 다른 많은 초화들도 하루가 다르게 피어나고 있어, 5월은 그냥 꽃의 대잔치 시즌이다. 숙근 세이지가 만개했다. 장미 밑에서 장미의 동반자 식물로 궁합이 좋은 이 꽃은, 곧게 뻗은 꽃대의 튼튼함과 의외의 볼륨감, 그리고 톤다운된 색감 등이 매력적인 꽃이다. 분홍과 파랑, 두 컬러 모두 괜찮지만 아무래도 밝고 화사한 꽃들에 변주를 주는 파란색의 세이지가 조금 더 매력적이다.
장미 앞이 숙근 세이지라면, 장미의 뒤쪽은 리나리아 퍼퓨리어 캐넌웬트가 자리 잡고 있다. 지난겨울 우리 집 노지월동 최강자 중 하나였던 이 꽃은, 장미의 비료를 함께 흡수하며 쑥쑥 성장했다. 그리고 5월, 꼬리풀과 비슷한 원추형 모양의 딸기 우유 빛깔 꽃대를 시원시원하게 올리며 정원에 이국적인 풍경을 만들어 주고 있다. 정원이 넓다면 군락으로 만들어 보고 싶은 매력적이고 기품 있는 꽃이다.
토종 붓꽃도 5월의 정원을 장식하고 있다. 그러나 토종 붓꽃은 마당의 자리를 꽤 넓게 차지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꽃들처럼 많은 양의 꽃을 피워 내는 것이 아니라 효율성이 좀 떨어진다. 그래서 우리 집 마당에서는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 또 개화기간도 짧은 계륵 같은 존재라 정리를 좀 해줄 계획이다.
2년 만에 제대로 자리 잡은 아스트란티아는 꽃의 수, 꽃대의 튼튼함 등이 작년 1년 차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성장했다. 햇빛을 머금었다가 다시 내뿜는 이 녀석을 보고 있으면, '그래 이런 게 바로 살아 있는 보석이지. 우리 집 마당에 금은보화가 가득이군' 이런 만족감과 기쁨을 선사해 주는 꽃이다.
마당에 쨍한 노란색의 꽃 하나 정도는 필요할 것 같아 데리고 온 코레옵시스 '얼리 썬라이즈'. 꽃이 피고 나니 확실히 분홍, 파랑, 흰색의 꽃들 사이에서 존재감을 독차지하고 있다. 적당한 키와 폭, 튼튼한 꽃대와 긴 개화기간, 그리고 프릴을 연상시키는 화려한 꽃모양으로 5월의 정원에서 제 몫을 단단히 하고 있다.
5월 말에 본격적으로 피기 시작한 톱풀도 사랑이다. 화려하고 커다란 꽃들 사이에서 채도 낮은 색감으로 다글다글 잔잔하게 깔리며 정원의 배경이 되어 주는 꽃이 바로 톱풀이다. 인위적이지 않은, 자연스러운 정원을 연출하는 데 있어서 톱풀이 꼭 있어야 할 것만 같아 이 꽃은 같이 가고 싶다. 하지만 톱풀은 정원 여기저기로 너무 잘 번지는 특징 때문에 다른 꽃들의 영역을 마구 침범하니, 우리 집과 같은 아주 작은 마당에선 관리하기 힘든 꽃이다.
5월을 지나 여름으로 향하면서, 또 2년 차의 마당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덩치를 키우기 시작한 꽃들 때문에 정원이 포화 상태가 되었다. 그래서 작년에는 햇빛을 받았던 꽃들, 그리고 올해 4월 초까지 충분한 자리가 있었던 꽃들 중에서 다른 꽃들 밑에 깔려 숨쉬기 힘들어하는 꽃들이 생겼다.
이렇게 몇몇 자라기 어려운 상태가 된 꽃들의 자리를 옮겨 주었는데, 이 꽃들이 옮겨간 곳도 포화상태 직전인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떠돌이 신세가 될 수도 있다. 그래도 당분간은 이사 간 자리에서 햇볕을 받고 덩치를 좀 키울 수 있기를 바란다.
이 와중에 새로운 꽃을 또 들였다. 사실 새로운 꽃을 구입하게 된 핑계는 있었다. 장미 앞에서 너무 크게 자라 감당이 안될 정도로 산만해진 차이브를 정리하고 나면 그 자리가 비게 되니, 그곳에 새로운 작은 꽃들을 심을 계획이었다. 하지만 차이브의 꽃이 다 지면, 차이브의 잎이 다 시들면, 이렇게 차이브에 대한 미련이 자꾸 생겨 새로 데리고 온 꽃들 심기를 주저하고 있었다.
그런데 포트 안에서 끝없이 대기하고 있는 꽃들이 너무 괴로워하는 것 같았다. 결국 차이브 정리는 뒤로 한 채 자리를 꾸역꾸역 만들어 장백패랭이, 아르메니아, 왜성종 루드베키아 등 새로운 꽃들을 마당에 심었고, 정원은 한층 더 포화 상태가 되었다. 이런 상태인 데도 새로운 꽃에 대한 욕심이 계속 생겨나고 있으니, 아마도 가드닝 하는 사람들의 고질병 같은 건가 보다.
지난봄에 파종했던 백일홍과 메리골드가 포트 안에서 꽃을 피울 만큼 성장했다. 어서 빨리 마당에 심어 달라고 모종들이 소리를 지르고 있지만, 아직은 심을 자리가 마땅히 없다. 튤립과 수선화도 정리가 덜 되었고, 2년 넘게 키운 몇몇 꽃과 그라스도 아쉽지만 우리 집과는 이별을 해야 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답답하고 아쉬운 마음을 안고 파종이들 한 번 보고 땅 한 번 보고, 괜히 마당만 어슬렁거리는 중이다.
가드너들에겐 더할 나위 없는 5월이다. 이 아름다운 순간을 보기 위해 작년의 5월이 끝난 후부터 올해 4월까지 정원을 가꾸고, 기다리고, 설레며 보낸 1년의 시간. 그 정성이, 그 노력이, 그 애정이 기쁨과 보답으로 최고의 선물처럼 찾아오는 요즘이다. 하지만 가드너들에겐 여름과 가을의 정원이 주는 선물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개봉박두 엔들리스 섬머 수국, 개봉박두 잉글리시 라벤더, 개봉박두 아스틸베와 여름꽃들! 시원하고 박력 넘치는 여름꽃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그럼 만화의 가드닝 일기, 오늘은 이만.
(2024년 5월 16일~5월 3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