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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트립 Oct 30. 2023

마법의 언어, "데 돈데 에레스?"

중고교 학창 시절을 떠올리면 매년 한 차례 맞는 신학년 3월 첫 주가 싫었다. 남들보다 새 친구를 빨리 사귀지 못하기 때문이다. 학년이 바뀌어 새로 헤쳐 모인 새 학급에서 약간은 상기되고 어색한 흥분 속에서도 아이들은 잘도 떠들었다. 알던 친구와, 혹은 새 친구와. 종례시간 담임의 등장을 기다리는 시간이면 나는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고 꼿꼿하게 앞만 보고 앉아 그 불편함을 견디곤 했다.



데 돈데 에레스?


페루의 대표 관광지 아니 남미의 일번지 명소인 마추픽추(Machu Picchu)를 가기 위해 아구아스칼리엔테스(Aguas Calientes)란 마을에 갔을 때다. 마추픽추 입장이 오후 2시에 예약되어 있어 우리 부부는 오전 시간을 보내기 위해 마을에 있는 작은 온천을 찾았다. 


산깊고 물많은 마추픽추마을 '아구아스칼리엔테스'(왼쪽 행렬은 마추픽추로 올라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천연 계곡을 막아 야외 온천으로 꾸민 것으로 탈의실과 샤워장, 라커룸이 구색대로 갖춰져 있었다. 온천탕도 별도 정제 없이 자연 온천수를 그대로 쓰는 것 같았다.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노천탕에 몸을 담그고 있으니 몸은 따뜻하고 머리는 맑고 눈은 초록 신선한 것들로 가득 찼다. 가만히 있기만 해도 수명이 늘어나는 것 같았다. 


아구아스칼리엔테스의 온천


사실 온천탕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할 일이 없다. 관광객 같아 보이는 다른 사람들도 넓지 않은 탕 안 한쪽 귀퉁이에 등을 기댄 채 서로 물끄러미 쳐다보고만 있었다. 학창 시절, 절대로 남에게 먼저 말 걸지 않던 나는 어디로 갔는지 주변에 보이는 관광객에게 말을 건넸다. "데 돈데 에레스?(De donde eres? 어디에서 왔어요?)" 


잉어들이 노는 연못에 과자 한 조각을 던져 본 적이 있는가? 마치 과자 한 조각에 일제히 모여드는 연못의 잉어 떼처럼 내가 던진 말 한마디에 온천탕 안의 현지인들이 순식간에 우리를 에워싸고 모여들었다. 족히 10여 명은 되어 보였다. 20대쯤의 젊은 친구들이었다. 페루의 아레키파(Arequipa)와 여타 지역에서 온 내국인 관광객들이었다. 


갑자기 여기저기에서 질문이 쏟아졌다. 어디에서 왔느냐? 여기는 처음이냐? 몇 살이냐? 페루에서 세비체는 먹어봤느냐? 한국은 무슨 음식이 대표 음식이냐?... 첫 질문은 내가 했건만 나는 어느새 질문자에서 답변자로 역할이 바뀌었다. 한국 드라마와 영화, 케이팝 이야기도 나왔지만 대답은 역부족이었다. 스페인어 실력도 실력이려니와 그 친구들보다 내가 한국 드라마나 젊은 가수들 이름을 더 몰랐기 때문이었다.


사실 나는 노천탕에서 어색하게 있는 게 싫어서 인사성 멘트로 날려본 말일뿐인데 내가 자기들을 궁금해하는 것보다 그들이 동양인 이방인인 우리를 훨씬 더 궁금하게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 정도 격렬한 반응이 나올 줄은 몰랐다. 아구아스깔리엔테스에서 올랐던 마추픽추만큼이나 기억에 오래 남을 일이다.


사진으로 많이 봤지만 실제로 보니 더 신비롭고 감동적이었던 곳, 마추픽추



남미 와서 연예인 체험


온천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중학생쯤으로 보이는 단체팀이 길가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한 아이와 눈이 마주쳐 "부에나스 따르데스(안녕하세요?)"하며 지나는데 "데 돈데 에레스?"라고 묻길래 "소이 데 꼬레아(Soy de Corea. 한국에서 왔어요)"라고 했다. 순간 식당에 있던 십여 명의 아이들이 밖으로 뛰쳐나와 우리를 둘러싸고 같이 사진 찍자며 난리가 났다. 나중에는 사진을 찍어주던 엄마도 자기랑 같이 찍자고 해서 찍어주었다.


쿠스코 탐보마차이(Tambomachay)에서 만난 쿠스코에 산다는 모녀들도 같이 사진 찍자고 하며 우리를 반겼다. 페루 사람들이 유난히 정이 많나 싶을 정도로 페루에서 이런 일을 많이 겪었고 인지상정이라 나도 페루에 정이 더 갔다.


페루 쿠스코 근교의 해발 5,000미터의 비니쿤카(Vinicunca). 일명 '무지개산'으로 불린다.


아이들도 어른들도 다 이렇게 한국을 좋아하나? 사실 페루뿐 아니었다. 과테말라, 콜롬비아, 볼리비아와 칠레에서도 이런 류의 경험이 이어졌다. K-영화와 드라마, 케이팝과 K-푸드의 한류가 남미 대륙까지 상륙한 걸 정작 '한국에 있는 우리 한국인'만 모르고 있었다. 장담컨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남미에 가면 연예인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오륙십 대의 중년 부부인 우리에게까지 이럴진대 한국의 젊은 친구들은 남미의 뭇한국팬들에게 살짝 시달릴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장기 여행과 여행 넉살


남에게 먼저 말 걸지 못하던 어린 시절의 소심한 내가 변했다. 나이를 먹어서 나이 넉살이 늘었는지 장기 여행을 다녀서 여행 넉살인 늘었는지, 아니면 둘 다인지 모르겠지만 아무렴 어떠랴. 


여행 중에 각국의 현지인들과 여행자들을 많이 만났다. 투어에서 만난 여행자들에게 "데 돈데 에레스?"라고 내가 먼저 말 건네는 순간, 내 말이 마치 방송 촬영의 '레디 큐' 싸인인 것처럼 기다렸다는 듯이 말문이 터지기 시작했다. 스몰토크는 절대 스몰토크로 끝나지 않았다. 자기들이 다녀온 나라, 앞으로 여행 계획과 실시간 현장 정보까지 주고받았다. 


"데 돈데 에레스?" 역시 마법의 언어다. 그 마력을 알아버린 나는 지금도 수시로 던지고 다닌다. "데 돈데 에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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