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네에서 딱 하루만 머문다면 아크로폴리스에 가라! 아마 아테네 여행을 다녀온 사람이라면 다 동의하지 않을까?
아크로폴리스부터 갈까? 아크로폴리스 박물관부터 갈까?
그렇다면 아크로폴리스부터 갈까? 아크로폴리스 박물관부터 갈까? 이 질문에는 이견이 있을 것 같다. 유시민 씨는 <유럽 여행 산책>에서 박물관부터 가는 걸 추천했다. 나 또한 그럴 계획이었지만 어쩌다 보니 아크로폴리스 방문 후에 박물관에 가게 되었다.
'숲부터 보고 나무를 보는 식'으로 여행하는 걸 좋아하는 내게는 실물부터 보고 박물관을 나중에 본 게 더 괜찮은 선택이었다. 아크로폴리스에 올랐을 때 신전들이 서있는 배타적이고 고압적인 위치, 그곳에서 내려다보는 도시 경관으로 인해 '아! 아크로폴리스는 이런 거구나'를 온몸으로 느꼈다고나 할까.
박물관은 아크로폴리스의 보충 설명서였다. 실물 직관 후 박물관에서 신전 모형과 조각들을 만나니 박물관을 좋아하지 않는 나조차도 세심하게 보게 되었다.
엘긴의 대리석(Elgin Marbles) 은 없다
박물관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전시품인 '카리아티드(Caryatid) 여인상'을 봤을 때였다. 에렉테이온 신전을 떠받치는 여인상이 아크로폴리스에서는 6개였는데 박물관에는 5개밖에 없었다. 아크로폴리스에 있는 것은 모형이고 박물관에 있는 것이 진품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진품 1개가 없는 셈이다.
에렉테이온 신전의 모형
카리아티드 여인상 진품 1개는 런던 대영박물관의 19번방 소위 엘긴룸에 있다.
여인상 진품 1개는 현재 영국박물관에 있다. 그리스가 오스만 제국 시절 영국 외교관 토머스 엘긴이 여인상을 비롯해 파르테논 신전의 주요 조각품 200여 점 넘게 뜯어갔고 이것을 영국 박물관이 구입해 '엘긴의 대리석'이란 이름으로 전시하고 있다고 한다. 안 그래도 기둥만 남다시피 한 페르테논 신전에서 미려한 조각만을 골라 절반도 넘게 뜯어간 것이었다. 파르테논 신전의 나머지 반을 보려면 런던까지 가야 한단 말인가!
엘긴이 파르테논의 조각을 떼어 배로 33회에 걸쳐 영국으로 실어갔다고 한다. 아테네의 파르테논은 사실상 기둥밖에 없다.
영국 시인 존 고든 바이런(1788-1824)이 파르테논 신전을 방문하고 이런 시를 남겼다고 한다. "이것을 보고 울지 않는 자, 어리석어라, 너의 벽은 마멸되고, 허물어진 신전은 빼앗겼다. 너의 쓰러진 신들은 북쪽의 증오스러운 나라로 끌려갔도다."(차일드 헤럴드의 순례)
멜리나 메르쿠리, 엘긴의 대리석이 돌아오는 날까지
아름다운 조각상이 약탈당한 신전을 두고 울었던 사람은 바이런뿐이 아니었다. 누구보다 '큰 울음'을 낸 사람이 있었다. 멜리나 메르쿠리(Melina Mercouri, 1920-1994)였다.
영화 '일요일은 참으세요(1960)'로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으며 세계적 명성을 얻은 배우였던 그녀는 그리스 독재 정권 시절 군사 정권에 저항했다는 이유로 그리스에서 추방당해 외국 망명 생활 중 그리스 민주화를 지원했다. 이후 그리스가 민주화되자 모국으로 돌아와 국회의원을 거쳐 문화부 장관을 지내게 된다.
그녀는 "세계 어디에도 엘긴의 대리석(Elgin Marbles)은 없다, 파르테논의 대리석(Parthenon Marbles)만 있을 뿐이다."를 외쳤다. '파르테논 대리석의 반환'에 앞장섰고 '각국 문화재의 소유국 반환 문제'를 국제 사회에 이슈로 던졌다. 오늘날도 시행되고 있는 '유럽의 문화 수도' 정책과 아테네를 첫 번째 문화 수도로 지정한 점, 문화재 반환을 대비한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의 건립 등이 그녀의 업적이다.
문화재 통합 보존에 관한 그녀의 뜻을 기려 '유네스코-멜리나 메르쿠리상'을 제정해 '문화 경관 보호와 관리'에 국제상을 수여하고 있다(1995~). 사진 출처unesco.org
멜리나 메르쿠리는 생전 그토록 원하던 파르테논 대리석의 환수를 이루지 못한 채 1994년 세상을 떠났고 그리스인의 가슴에 '현대판 그리스 여신'으로 존경받고 있다.
신사의 나라와 엘긴의 변명
식민지 지배국의 약소국 문화재 약탈을 '엘기니즘(Eliginism)'이라고 한다. 엘기니즘의 당사자 영국은 왜 그리스 문화재를 반환하지 않는 것일까. 왕년의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의 대답은 '자신들이 더 잘 보존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엘긴의 변명'이다. 이토록 폼 빠지는 영국을 누가 '신사의 나라'라고 부르는가.
만약 자신이 죽은 후에라도 파르테논 대리석이 그리스로 돌아온다면 잠시 무덤에서 나와 춤을 추겠다고 했던 그녀가 무덤에서 나올 날은 언제일까? 문화재는 '있어야 할 곳에 있을 권리'가 있다. 인류는 '인류의 보편적인 유산을 원래 있던 곳에서 감상할 권리'가 있다.
하드리아누스 문 건너편에 있는 멜리나 메르쿠리 동상(구글 지도 위치 : Melina Mercouri Manument)
멜리나 메르쿠리의 박물관을 어렵사리 찾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굳게 닫혀 있었고 대신 그녀의 동상을 찾아가 보았다. 파르테논을 아테네에서 온전히 볼 그날에 아테네를 다시 방문하고 싶다. 멜리나 메르쿠리가 잠들어 있는 아테네 제1묘지의 그녀의 무덤에 놓을 꽃 한 송이 들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