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건축가의 프랑스 건축가 되기 첫걸음에 대한 기록
인생 첫 구직 활동을 서른 중반이 돼서야 처음으로 그것도 프랑스에서 하게 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어쩌면 알고 있었지만, 실감을 하게 된 것은 정말로 그것을 맞닥뜨린 순간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겠습니다. 이미 게재한 글을 통해 이곳에서의 첫 직장을 구했음을 알렸습니다. 건축학교의 졸업 작품 마무리 후, 여름 바캉스를 가족과 함께 보낸 뒤, 약 두 달이 조금 안 되는 기간 동안 준비하고 겪었던 구직 활동. 앞서 자인한대로 처음이었기에 꽤나 짙고 강한 인상으로 남았습니다. 프랑스라는 배경 덕분에 그것은 비단 구직활동의 어려움에 그치지 않고 또 제가 가지고 있는 조건, 성향과 새로 만난 문화 등의 다양한 조건이 만나 이루어진 하나의 복합적인 무언가가 되었습니다. 이는 제가 가졌던 총 다섯 번의 면접을 통해 얻어진 것이며 그것을 정리해 둔다면 추후 제 스스로 돌이켜 볼 가치도 있으리라 생각돼 오늘도 자판에 손을 얹습니다.
첫 구직이었지만, 제 조건은 남들과는 특히 함께 건축학교를 졸업한 친구들과는 전혀 같지 않았습니다. 이미 한국에서의 7년의 실무와 그와 함께 취득한 건축사 자격증이 제일 대표되는 저의 경험이자 경력이고, 프랑스 현지에서의 경험은 건축학교 2년의 석사 과정, 그리고 그와 함께 아르바이트 식으로 일주일의 몇 차례 씩 일을 함께 했던 건축가 프레데릭 보헬과의 경험입니다. 건축학교에서 요구하는 졸업을 위한 인턴 경력은 저의 한국 경력으로 면제가 된 상황이기에 정식으로 일을 한 경험은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프레데릭과의 경험은 매우 소중하고 그 덕분에 프랑스 건축에 대한 이해도가 매우 높아지긴 했지만, 공식적인 인턴이 아니었고, 함께 한 작업물도 공모전과 몇몇의 도면 수정 및 아카이빙 수준으로 제가 보기엔 소일거리에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석사 과정 2년 동안 꾸준히 함께 했기에 질에 비해 양은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위와 같은 바탕을 두고 제가 세운 전략은 타지에서 일을 구하는 외국인이라는 불리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감안하여 최대한 프레데릭과의 경험을 통해 최소한의 관심을 유발하고, 제가 이미 쌓아온, 스스로 입증할 수 있는 실무적인 능력을 강조하여 어필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지원하는 건축 사무소, 아틀리에, 혹은 에이전시에는 엄청난 기준을 두진 않았습니다. 물론 건축을 하는 입장에서 최소한의 취향은 반영하였지만, 한 건축가의 사무실이라고 특정하거나, 어떤 수준 이상의 사무실이라고 특정하지는 않았습니다. 건축이라는 분야에 몸담아오며 점점 강해지는 확신은 건축은 굉장히 개인적이고 내밀한 작업이라는 점입니다. 떤 집단에 몸담거나, 어떤 이와 함께 있다 하여 절대 같아질 수 없고, 그것이 자기를 대변한다고 착각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입니다. 즉, 네임 밸류, 유명세가 아닌 제가 보기에 내실 있는 곳을 택하려 애썼습니다. 어디서든, 누구와 함께든 본인의 판단과 분별만 있다면 분명 남는 것이 있을 것이고, 그것을 원동력으로 최종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거창한 포부와 같지만, 결론은 가리지 않고 거의 모든 곳에 연락을 취했다고 보는 것이 맞겠습니다. 물론 모든 곳이라 함은 제 기준에 맞는 곳이었습니다만... 그렇게 해서 면접까지 다다른 곳이 총 다섯 군데였습니다.
첫 번째의 연락은 급하게 사람을 구하는 공고로 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꽤나 규모 있는 사무소로 프랑스의 대표 명품 기업의 프로젝트를 도맡아 진행하는 곳이었기에, 제가 전혀 겪어보지 못한 환경을 갖춘 곳이었습니다. 인사 담당자와 그의 어머니이자 대표 건축가 중 한 분과 가지게 된 면접.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고 볼 수 있지만, 그들이 제게 물은 것은 제 이력에 적혀 있는 프레데릭과의 작업 중 몇몇의 현장 설계와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즉시 인테리어 현장에 투입할 인원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앞서 밝혔듯이 프레데릭을 통해 제가 했던 일은 그리 양적으로 질적으로 많거나 깊지 않았기에 저는 그것을 대신해 제가 한국에서 진행했던 다양한 감리의 경험을 이야기했습니다. 현장 경험은 저 또한 누구 못지않게 많고 자신 있었기에 열심히 어필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제 이야기를 흥미롭게 여김과 동시에 서둘러 면접을 종료하고자 하는 뉘앙스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인들이 대화 중 입버릇처럼 말하는 '흥미롭다'는 말은 때론 이제 그만 대화를 마치자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마무리하고 나온 첫 면접. 저는 사무소를 나와 한동안, 아마 이틀 정도의 시간 동안, 자괴감을 빠졌던 것 같습니다. 마치 무언가를 팔아야만 하는 장사꾼처럼 열심히 판촉을 한 것과 그것이 생각처럼 와닿지 않음까지 느꼈기 때문입니다. 처음이라는 사실에 저도 모르게 한껏 힘을 주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며칠 뒤, 약속한 날, 아쉽지만 더 적합한 인원에게 기회가 돌아갔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고맙게도 당신은 매우 인상적이었으며 잘 될 것이라는 응원을 함께 남겨 주었습니다.
두 번째 면접, 역시 현장 경험이 풍부한 인원을 찾는 공고였습니다. 첫 번째와는 달리 열명 남짓의 중소규모 아틀리에였고, 상대적으로 젊은 세 명의 소장이 이끄는 곳이었습니다. 면접 시간이 5시 45분이었고, 5분 정도 일찍 도착한 저는 면접을 마치고 나오는 또 다른 인원과 마주칠 수 있었습니다. 15분의 촘촘한 간격으로 꽤나 많은 인원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면접은 형식적이지만, 역시나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진행되었습니다. 첫 경험을 반면교사로 삼아 지나친 판촉은 하지 않되 자신 있는 점만 강조하자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현장 투입이라는 목적이 명확했던 지라 가장 중요한 첫 질문은 어김없이 프레데릭에서의 제가 했던 일에 대한 확인이었습니다. 제가 했던 현장 소통을 위한 몇몇의 도면 수정과 서류 작업을 애써 설명하긴 했지만, 그들의 기대에는 못 미침을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이어서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제 한국에서의 경험을 설명하였습니다. 대신,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자는 생각으로 어필이 아닌 설명에 주안을 두었습니다. 역시 흥미롭다는 반응과 함께 면접은 끝이 났습니다. 첫 번째 면접의 경험을 타산지석 삼은 덕분인지 정신적인 타격은 훨씬 덜 했지만, 결국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직감 또한 어김없이 다가왔기에 아쉬움이 컸습니다. 결정적으로 면접 마지막 순간, 본인들은 제가 전혀 사용해보지 않았던 프로그램으로 설계를 진행한다는 말을 보탰기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이미 너를 거절한다는 통보와도 같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면접을 본 지, 몇 주가 지나 이미 다른 곳에 채용이 된 최근에 그들로부터 메일이 한 통 왔습니다. '정말 큰 고심 끝에 최종 2인 중에 있었음에도 선택하지 못해 미안하다. 하지만 변수가 있을 수 있으니 계속 연락을 취해달라.'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어디까지가 진심이고 어디까지고 입에 발린 말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나은 결과가 아닌가 싶습니다.
연거푸 고배를 마신 뒤, 또 한 번 보낸 여럿의 지원 중 한 곳의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곳은 정말 작은 규모의 사무소로 대표 건축가 1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몇 명인지 확인이 안 될 수준이었습니다. 그렇기에 해당 건축가가 직접 메일로 답신을 했고, 빠르고 간결한 대화와 함께 만남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달랐던 규모와 시스템처럼 면접 또한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제 이력 전체를 관심 있게 보았고, 이력서 외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이전 면접과는 달리 제 포트폴리오의 특정 프로젝트, 그것도 한국에서 진행한 것을 콕 집어 설명을 부탁하였습니다. 처음으로 제 한국에서의 이력에 관심을 보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제 개인 작업물도 칭찬하며 자신의 프로젝트를 소개하며 마치 건축가와 건축가의 대화 같이 면접이 흘렀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작은 규모와 시스템으로 인해 외국인을 직원으로서 고용할 여력이 없어 프리랜서(자유신분) 계약으로 밖에 불가능하다 하여 채용까지 성사되진 못하였습니다. 똑같은 실패였지만, 그로 인한 감정은 전혀 다른 경험이었습니다. 이곳에도 누군가 나를 나로서 관심 있게 보고 순수하게 건축을 하는 한 명으로 보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안도가 가장 컸습니다. 아마 이것 덕분에 조금은 더 힘을 내 구직을 이어갔던 것 같습니다.
네 번째는 정말 의외의 사무소와의 면접이었습니다. 지원하는 시기 중 극 초반에 지원하여 약 한 달이 넘게 지난 시점에 온 회신이자 답변을 한 곳이었고, 꽤나 프랑스에서 독보적인 디자인과 입지를 가지고 있는 한 건축가의 사무소입니다. 사실 프레데릭이 주최한 개인 파티에서도 몇 번 본 적이 있었고, 사실 그 기억 덕분에 지원한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말을 섞어보거나, 프레데릭을 통해 소개를 받거나 할 정도로 친분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기에 이미 잊힌 지원과도 같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락을 받게 된 것에 감사하며 면접에 응했습니다. 물론 면접은 대표 건축가가 아닌 아래 한 소장과 하게 예정돼 있었습니다. 시간에 맞춰 도착했음에도 제시간에 시작되지 못한 면접. 아니나 다를까, 예정되었던 소장이 아닌 다른 소장이 면접관으로 입장하였습니다. 그 때문인지 제 이력서, 포트폴리오 모두 숙지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고, 저는 그 자리에서 소개와 설명을 해야 했습니다. 흥미로웠던 점은 이미 알고 있었던 해당 건축가의, 사무소의 대표 프로젝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순간이 있었는데, 대화를 이어가던 중 면접관인 소장 제게 열심히 스케치를 그려가며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설명을 해준 점에 감사하고 건축에 대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점은 인상적이었지만, 저는 알게 모르게 그의 말속에서 거만함을 느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자신감으로 비칠 수도 있겠으나, 저는 상대적으로 부정적인 뉘앙스를 조금 더 캐치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많은 나이가 아니고 그만큼 엄청나 경험이 있지는 않지만, 사람을 만나고 대하는 순간 받게 되는 인상이 점점 더 정확해짐을 느낍니다. 결국, 다소 애매한 시작과 흐름으로 끝이난 면접은 당락 여부에 대한 뚜렷한 회신도 없이 기억에서 잊혔습니다.
얼마 뒤, 잘 안된 것이 다행이라는 주변 선배와 심지어 프레데릭의 말을 들었고, 제가 느낀 것과 받은 인상이 실제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올 해의 마지막으로 생각하고 임한 다섯 번째 면접이 제게 좋은 결과와 답변을 가져다주었습니다. 80명 정도의 규모로 역시 작지 않지만, 2명의 창립자 겸 대표 건축가를 제외한 4명의 소장급 건축가들이 각자의 팀을 꾸려 운영하는 곳입니다. 그 소장 중 한 명이 제가 제출했던 자발적 지원서(공고 없이 스스로 보낸)에 응답을 주었고, 이 또한 2~3주가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면접을 일정을 정하고 만나는 당일까지 모든 게 깔끔하고 순리대로였던 좋은 분위기와 감정이 실제 면접까지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직접 면접을 알렸던 당사자인 소장과 직접 만나 대화하였고, 그는 제 이력서를 직접 출력해서 들고 온 첫 면접관이었습니다. 본인 손에 쥔 이력서의 한 줄, 한 줄, 프레데릭에 관한 내용부터 제 한국에서의 경력 모두를 제게 묻고 확인하며 반응하였습니다. 모두를 진심으로 흥미롭게 여기는 듯 보였고, 제 언어적 능력도 확인을 하였는지 본인과의 대화에도 문제가 없다고 코멘트를 주었습니다. 희망 연봉을 묻고, 이어 본인들의 복지 및 시스템에 대한 소개까지 하며 면접은 마무리되었습니다. 제 스스로 다시 보아도 이미 제가 묘사한 면접의 분위기가 결과를 예감케 합니다.
면접 후, 함께 하자는 연락을 직접함과 동시에 외국인으로서 진행해야 하는 계약 과정 모두 차질 없이 진행하였습니다. 인사 담당 직원도 매우 친절하고 능숙해 제 비자를 위한 절차도 이미 밟았고, 이전에 게재한 글에서 밝혔듯이 내년 초부터 근무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다섯 가지의 면접에 대한 기억을 재조직하는 수준의 글로 마무리되었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때 느낀 감정, 그때 느꼈던 공기를 다시금 상기할 수 있는 흥미로운 순간입니다. 이랬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후회와 아쉬움이 없지는 않지만, 지금 그보다 더 명확한 것은 하나의 결론입니다.
저는 평소에 '운칠기삼'이라는 말을 많이 하고, 마치 제 인생의 슬로건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를 운에 기대라는 말로 쓰지 않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운이라는 것은 우리를 아 루르는 환경과 그로 인한 변수를 감안한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만날 사회적 환경, 그리고 그 속에 만나는 사람들이 그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의 다섯 면접을 통해 저는 제가 태어나서 자란 환경이 아닌 전혀 다른 문화의 환경에서 그것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이와 같은 조건에서 저를 저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사람을 만나는 것이 저는 운에 해당한다고 생각합니다. 운이라는 것이 쉽게 찾아오지 않듯이, 저를 받아들이고 인정할 사람을 찾는 것 또한 쉽지 않아야 이치에 맞을 것입니다. 입장을 바꿔, 제가 소장으로 외국인을 채용하며 선뜻 오케이 하는 모습을 저 또한 스스로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만큼 귀한 운이고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 70%의 운보다 30%의 기에 더 큰 무게를 둡니다. 제가 생각하는 '기'는 단순한 재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의 노력과 준비라고 생각합니다.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운에 대한 대비를 항상 하고 있어, 운이 찾아오는 순간 항상 100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합이 120, 130이 된다면 더욱 나은 결과가 되겠죠. 제 스스로 항상 30을 갖추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에 준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운칠기삼은 운이 기를 압도함이 아닌 다가올 운에 대비한 기가 없다면 일은 성사되지 않음을 알고 이를 경계하자라고 제 뜻으로 풀 수 있겠습니다.
이제 겨우 시작이지만, 앞으로도 아마 제게 수많은 운들이 스치듯 지나갈 것입니다. 항상 그래왔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마도 또 그에 대비한 30을 어떻게든 채우며 살아가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