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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띵북 Apr 18. 2023

마음의 고통만큼 약의 개수도 늘어났다.

엄마 인터뷰 2

---> 엄마 인터뷰 1 편에 이어......



새벽이라기에 밖은 칡흙같이 깜깜하다.

몽둥이로 맞은 듯 온몸이 통증으로 아프지만 그 아픔을 느낄 겨를조차 없이 분주하게 움직여야 한다.

아이 셋의 도시락을 싸야 하고 식구들의 아침밥도 준비해야 한다. 

그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지만 늘 촉박한 시간에 쫓기듯 아침 준비를 하고 모두가 아직 잠든 시간에 일터로 나선다. 빌딩 숲, 엄마는 높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 청소도구를 들고 몸을 바삐 움직여야 했다. 직원들이 청소원들과 마주치기를 꺼려했기에 그들이 출근하기 전에 모든 일을 마무리해야 했다. 자신들의 일터를 청결하게 해주는 그 일을 그들은 불결해했고 눈살을 찌푸렸다.   


건물 청소 하면서 가장 힘든 건 뭐였어요?

사람들의 시선이었지. 청소하는 건 나의 직업인데 그걸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것도 싫었고 나이도 한참 어린 직원들에게 90도로 깍듯하게 인사시키는 것도 싫었어. 인사해도 무시하고 지나가는 직원들도 있었거든. 그럴 때 정말 비참한 기분이 들더라.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은 거 같아.

웃긴 건 없는 사람들이 더 무시한다는 거야. 집에서 부업도 많이 했거든, 봉투 붙이기, 인형 눈알 붙이기, 야구장갑 꼬매기, 와이셔츠 실밥 뜯기, 연탄 배달, 벽돌·모래 나르기 등 안 해 본 일이 없는데 어떡해서든 돈을 적게 주려고 하는 거야. 개수 가지고도 엄청 싸웠지. 서울에서 내려와 부산사투리가 너무 무서워서 1년 동안 외출 한 번도 제대로 못했던 내가 애들 데리고 먹고살 거라고 얼마나 악바리처럼 살았던지, 다른 건 몰라도 돈 떼먹는 건 참을 수가 없더라. 그땐 싸움닭이 되어서 내걸 지키려고 했거든. 더도 덜도 말고 내 몫을 말이야.


밤낮으로 일하느라 너무 고생 많았겠다.

그땐 고생인 줄도 모르고 니 동생 낳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벽돌을 나르기도 했어. 주변에서 몸 푼 지 얼마 안 돼 그러다 큰일 난다고 말렸지만 난 그때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했거든. 하루빨리 전셋집이라도 얻어야 했으니깐.

그런데 몸 사리지 않고 일한게 나중에 큰 후유증으로 오더라. 


엄마 수술 여러 번 했잖아.

한쪽 팔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어깨뼈가 상해서 여러 번 수술을 받았는데도 정상인처럼 활동할 수는 없었어. 이젠 병뚜껑도 내 손으로 열지 못할 정도니 말 다했지 뭐. 그런데 가장 고통스러운 거 불면증과 우울증이야. 신경안정제와 수면제 없이는 삶을 살아낼 수 없어. 한 번은 식탁 위에 놓여있는 수면제 통을 보는데, 저걸 한 입에 다 털어 넣으면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 같은 생각에 그걸 몇 번이나 들었다 놨다 했는지 몰라. 그런데 자식들 생각하니 정신이 번쩍 들더라. 그 와중에 새끼들 생각은 왜 그리 나던지, 내 새끼들 불쌍해서 안 되겠더라고.


엄마의 아픔을 내가 너무 몰라줘서 미안해. 

아니야. 알면서도 나 모른 척한 거 같아 그래서 더 미안해.

니가 엄마이야기 물어봐줘서, 그리고 들어줘서 고마워.

이게 이야기가 될지는 모르겠다만...




엄마는 신경안정제와 수면제를 20여 년간 드시고 계시다. 약을 여러 번 바꿔봤지만 이제 잘 듣지를 않는다. 일주일 동안 잠을 주무시지 못했을 때는 엄마가 베란다 앞에 서 계셨다. 엄마가 죽을 생각에 몇 번이나 올라갔을 베란다. 새벽녘 미친 사람처럼 밖으로 뛰쳐나가 하염없이 걷기를 수십 번. 그런 엄마를 뒤쫓아와 해치려 했던 위험한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결국 참아내고 이겨냈을 엄마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무엇보다 할아버지의 죽음 후 닥친 새엄마와 이복동생들 간의 긴 유산 다툼은 엄마 마음에 큰 상처를 줬다. 비록 배다른 동생들이었지만 없는 형편에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건만 되돌아온 건 배신이었다. 여린 엄마를 한가운데 몰아넣고 여섯 동생과 제부들은 강제로 서류에 동의하게 만들었고 엄마는 극한 스트레스와 공포에 실신까지 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냥 인연을 끊고 살면 그만일 줄 알았는데 몸의 고통보다 마음의 고통을 대변하듯 그렇게 약의 개수는 점점 늘어나고 있다. 기억을 지워버리는 약이 있다면 좋으련만 불쑥불쑥 찾아오는 나쁜 기억들은 엄마의 숨을 죄어오는 거 같다.


'그깟 거 그만 잊어버려'

'그것도 이겨내지 못하고 아직도 생각하고 있어'

'마음이 왜 그렇게 약해빠졌어'

가끔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화가 난다. 당신들이 그 고통을 아냐고, 당신들이었다면 아마 수없이 삶을 놓았을지 모를 거라고, 남의 이야기라고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말라고 말이다.


엄마는 잘 견뎠고, 지금도 이겨내고 있다.

그 많은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으셨고 가족들을 지켜냈다.

난 그 누구보다 엄마를 존경하고 사랑한다. 이 세상 누구보다도 훌륭하신 분. 

엄마가 우리 곁에 오래 함께 있어주시기를 오늘도 나는 욕심을 부려본다.


꿈 많던 10대 시절 엄마


엄마는 다음 생애는 뭘로 태어나고 싶어?

새로 태어나고 싶어. 하늘을 훨훨 날며 내가 가보지 못한 세상 구경을 하고 싶네. 그리고 이곳에서 좀 멀리 벗어나면 좋을 거 같다. 그러니 엄마 죽거든 산에 뿌려주라. 새로 태어나게 말이야.



<--- 엄마 인터뷰 1 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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