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힘든 과정 후의 기쁨

시칠리아여행

by 배심온

유레카!

아, 알았다. 순간의 깨달음으로 욕조에서 튀어나오는 아르키메데스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풀리지 않았던 과제가 목욕 중에 해결된 게 사실인지, 그의 동상은 속옷만 걸친 모습이다. 기원전 로마로부터 시라쿠사를 지켜낸 수학자답게 그의 손에는 컴퍼스와 포물면 거울이 들려있다.

시칠리아의 도시 시라쿠사를 대표하는 인물이 또 있다. 성 루치아다. 아르키메데스의 동상은 시라쿠사의 중심 거리에 있어서 쉽게 눈에 띄었지만, 카라바조의 그림 '성 루치아의 매장'과의 만남은 한순간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시라쿠사 도시의 수호성인이 세인트 루치아다. 우리가 노래 부르는 그 산타 루치아 말이다. 그래서인지 시라쿠사에는 루치아라고 이름 붙은 교회가 한두 개가 아니다. 시라쿠사 대성당에도 파사드 왼쪽에 크게 세인트 루치아라고 적혀있다. 대성당 안에 루치아를 위한 예배당이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시라쿠사 대성당을 지탱하는 기둥 중 일부는 로마시대의 것도 그대로 남아있어서 이 도시의 역사와 위용을 알 수 있다.

대성당 광장에서 바닷가 쪽으로 나가는 길목에 산타 루치아 알라 바디아 성당이 있다. 성당의 안내판에 카라바조 그림 포스터와 함께 문을 여는 시간이 공지되어 있다. 시라쿠사에 도착하는 날, 도시의 이곳저곳을 살펴보면서 이 공지를 보고 다음날 시간을 맞춰서 오리라 계획했다.

시라쿠사에 도착한 이튿날은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강우량이 적은 오전을 택해 카라바조 그림이 있는 성당을 찾았으나 성당은 문이 닫혀있다.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파피루스 나무와 백조들이 노니는 아레투사의 샘을 찾아 시간을 보낸다. 마니아체 성채를 걷고 왔는데도 여전히 성당의 문은 굳게 닫혀있다.


유명하다는 보르데리 샌드위치집에서 비도 피하고 점심도 해결한 후 다시 한번 대성당 쪽으로 발길을 향한다. 우비를 입은 채 성당 앞에서 기다리지만 성당의 문은 열릴 기미가 없다. 성당 앞 젤라토 가게도 불을 끄고 오늘 장사를 접는다. 비도 오고 성당도 열리지 않는 날 젤라토가 팔리겠는가?

그냥 포기하기에는 미련이 남아 성당 주변에 있는 남자에게 몇 시에 문을 여느냐, 여기 카라바조 그림이 있는 게 맞느냐고 물었더니, 비가 와서 오늘은 성당 문을 열지 않고, 카라바조의 그림은 또 다른 성루치아 성당에 있다고 친절하게 알려준다.


카라바조 그림을 두고 두 개의 성당에서 다툼을 벌이다가 결국 그림이 이쪽저쪽으로 옮겨 다닌다더니 지금은 이곳이 아닌가 보다. 그럼 그 안내문은 무엇이고, 비가 온다고 성당 문을 열지 않는 건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우리는 우선 젖은 신발도 말리고 잠시 휴식을 취하러 숙소에 들어갔다가 비가 잦아든 후 다시 길을 나섰다.


네오폴리스 고고학 공원을 둘러보고 나서, 카라바조 그림이 있다는 성당을 찾아 나선다. 디오니소스의 귀를 비롯해 그리스 원형극장과 로마 원형극장, 그리고 이고르 미토라이(Igor Mitoraj)의 많은 조각 작품들을 보고 나니 모두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래도 카라바조의 그림을 포기할 수는 없어서 일행에게 동의를 구한다. '성루치아의 매장'은 가디언지가 죽기 전에 보아야 할 그림 10점 중 하나로 선정했다는 점을 들먹이며, 나는 혼자라도 가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다행히 언니들도 함께 가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져 고고학 공원에서 다시 20분쯤을 걷는다. 차로를 벗어난 조용한 주택가에 포르톨레 산타 루치아 성당이 있었다.

성당 문은 활짝 열려있고 예배를 보는지 사람들도 꽤 많았다. 보통은 예수님 상이나 십자가가 놓여있을 성당 정면 한가운데 카라바조의 '성 루시아의 매장' 그림이 걸려있다. 성당의 제단화로 받쳐진 거다. 성당 안 사람들은 그림에는 관심도 없고 자신들의 행사에 집중하고 있다. 아이들이 단체로 세례를 받는 건지, 아니면 교리공부 검사를 받는 건지, 스무 명쯤 되는 아이들이 하얀 티를 입고 신부님과의 면담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들을 기다리는 학부모들은 늘상 있는 일이라는 듯 우리에게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의 행사를 진행하고 우리는 최대한 제단 앞 가까이 가 그림을 본다.


'성 루시아의 매장'은 카라바조가 몰타에서 요한 기사단이 된 후에 기사와의 다툼으로 감옥에 갇혔다가 탈옥하여 시라쿠사로 피신해 있는 동안 그린 작품이다. 이 그림에는 인부들이 화면 정면에 등을 보이고 서서 루치아의 시신 주위의 흙을 삽질하고 있다. 인부의 복장은 속옷차림이나 다를 바 없고, 그의 엉덩이에 빛이 떨어진다. 성 루치아의 시신은 관도 없이 흙바닥에 그냥 놓여있다. 부랑자의 죽음이나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성모 마리아의 죽음'에서도 마리아의 모델로 삼은 이가 물에 빠져 죽은 매춘부라는 논란이 있었다. 카라바조는 제단화임에도 불구하고 성인의 모습이 아닌 펑범한 사람들 또는 그보다 더 열악한 환경의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묘사했다. 특히 말이나 사람의 엉덩이를 화면을 향하게 하는 바람에 거부감을 느끼게도 한다. 노동하는 사람의 모습을 화면 정면에 부각한다거나, 피를 난사하는 장면을 묘사하여 사람들의 마음에 무엇인가 편치 않은 자극을 남긴다. 이런 점들이 카라바조를 바로크 미술을 여는 사람으로 일컫게 한다.

한 번에 성사되지는 못했지만, 시라쿠사에 있는 카라바조의 유일한 작품 '성 루시아의 매장'을 볼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이 그림을 찾아가는 과정이 시라쿠사 여행의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단 가까이에서 그림을 보다 보니 소문대로 1유로를 넣으면 불이 켜지는 장치가 벽에 걸려있다. 1유로의 동전을 넣으면 4분간, 좀 더 보고 싶으면 2유로를 넣으면 된다. 그러면 8분을 볼 수 있다. 우리는 교회 행사 덕분에 공짜로 보았지만 동전을 넣어야 불이 켜지고, 그제사 카라바조의 그림을 볼 수 있다는 게 왠지 씁쓸했다.


종교인으로서 이 그림을 바라보는 게 불편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제단 주위로 불도 밝히지 않는 걸까? 이것이 지나치게 어두운 카라바조 그림의 운명인가?


2025.4.2 저녁 타오르미나에서

keyword
수요일 연재
이전 23화카라바조 그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