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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imeSpace Mar 11. 2022

전역 전, 사회로의 어귀에서

대단원의 막은 내려가고 주인공은 방황하네


브런치는 산책로였다. 벅찬 감정을 느낄 때마다 그것을 추스르고 잔잔하게 한 걸음 한 걸음 걸으며 생각을 정리하던 산책로였다.


브런치의 글은 군생활의 기록이었다. 브런치에 발행한 모든 글들은 이곳 군에서의 직접, 간접적인 경험과 깨달음의 내용이다.


브런치에 발행한 글의 목록은 내 사유의 흐름이었다. 나의 생각은 이 공간에서 요동치고 때로는 단단히 굳으며 성숙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그 산책로 방문에 소홀해졌다. 브런치에서의 시간이 흐르지 않고 멈춰 있는 것을 보았다. 새로운 글이 올라오지 않는 나의 브런치는 생기를 잃은 내 모습을 비추는 거울 같았다.


거울이 병든 자의 창백한 얼굴을 보여주어 환자로 하여금 그의 상태를 실감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처럼, 브런치는 나의 증상을 설명해주었다.

그 병은 다름 아닌, 번아웃 증후군이다.


놀랍지는 않다. 진작에 그 증상을 알고 있었지만 부정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다 마침내 오늘 패배를 선언한 것이다. 패배를 선언한 이유는, 이렇게 가다가 전할 때까지 아무런 글을 쓰지 않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들었기 때문이다.


브런치에 군생활의 시작과 진행을 기록해왔는데 마침표를 찍지 못한다면 찝찝함 때문에 괴로울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지친 정신을 끌고 와 사력을 다해보려고 한다. 어차피 죽지는 않을 녀석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반대로 치료가 될지도 모른다.



분명 전역할 때 통과하는 위병소의 경계는, 주둔지 밖으로 일과를 하러 수 백번을 통과했던 그 경계와 다를 것이다. 마치 나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막을 뚫고 새운 세상을 향해 침투하는 기분이 들 것이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참 웃기다. 입대 전에는 군대라는 곳에서 어떤 일을 할지, 어떤 생활을 할지 모두 베일에 쌓여 다가올 미래에 대한 무지로부터 두려움을 느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다시 나 상상을 하니, 이미 20년을 살고 경험해 온 세상에 있을 나의 모습이 정말 어색하게 느껴져서 우습다.

나의 사회적 시간은 논산으로 가는 길목 어귀에 여전히 멈춰 있다. 이것을 다시 작동시키려니 동기화가 안되어 무척이나 당혹스러운 것이다.


종종 나는 밖에 있 나의 모습을 상상하곤 다. 기억 속에 저장된 이미지를 불러와 시간 순서로 나열하면 그대로, 혹은 의도치 않게 약간 각색된 상태로 재생해볼 수도 있다.

요즘 나는 밖에 있을 나의 모습을 상상하곤 한다.

기억 속에 저장된 이미지를 현재라는 프레임에 입혀 지금 당장 그 장면 속을 자유자재로 떠돌아다니는 상상을 해볼 수 있다.

그런데 밖에 있던 모습과 밖에 있을 모습 사이에는 말로 표현해낼 수가 없는 괴리가 존재한다.

전역하는 날에 위병소를 통과하면 분명 불연속적인 시간의 막대기들 사이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기분을 느낄 것이다.


나보다 먼저 나간 선임이나 동기는 40명이 넘는데, 전역을 앞둔 그들의 표정은 1년 반 동안 억제당한 자유와 욕구를 마구 터트릴 수 있는 기회를 가진 자가 내보일 것이라 했던 표정과는 사뭇 달랐다. 분명 그들은 좋아했고 웃음기가 있었지만 공허에 찬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기분을 이해하지 못했던 나는 소감이 어떻냐고 묻곤 했다. 돌아오는 대답은 비슷했다.


"실감이 안 나"

"딱히 별생각 없는데?"

"나가서 뭐할지 모르겠다"


그들은 분명 좋다고 했으나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다. 그리고 나도 이제 그 무언가를 느끼기 시작했다. 내 생각에 그 감정은 이름을 붙이기에는 굉장히 모호하고 추상적이다. 그래서 나는 그 감정을 그냥 '무언가'로 부르기로 했다.


그런데 정말 그 '무언가'는 무엇일까, 어떻게 설명하는 것이 좋을까. 그 무언가는 아마 사람이 죽기 직전에 드는 감정 혹은 생각 중 하나일 것이다. 과연 그럴까? 그 무언가의 감정을 알고 싶다면 그 감정이 생기기까지의 감정의 변천 과정을 소급해 보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 될 수도 있겠다.



논산으로 가는 길

논산으로 가는 길은 오히려 평온했다. 끝까지 발버둥 치다가 이내 포기하고 미지의 세계로, 조금은 과감하게 들어갔다.


훈련병

논산은 낯설었다. 두렵고 외로웠다. 입소 전 에는 유리제품 등과 약물을 반납고, 밤에 용변을 보러 가 특정 시간을 초과하면 불침번이 노크를 하며 태를 물었다. 이건 여담인데, 화장실에 자주 가는 사람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대부분이 몇 주 동안 변비로 고생했다. 아무튼 생활관 창문은 주먹 하나 들어갈 정도의 너비만 열 수 있었고 감기약을 다 먹으면 입을 벌려 약을 다 삼켰는지 검사해야 했고 면도기 함은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나는 그 이유를 짐작했고 정말 누군가는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밥을 먹으러 가거나 훈련을 하러 나갈 때엔 나란히 줄을 서서 걸었는데, 구호에 맞춰 군화 소리가 땅에서 울려 나오고 동시에 곳곳에서 군가가 장엄하게 울려 퍼졌다. 진행로 양쪽에 심어진 소나무들은 삼지창처럼 뾰족하거나 불타오르는 듯한 특이한 모양이었다. 그곳은 정말 다른 세상 같았다. 여전히 그곳의 분위기는 잊을 수가 없다. 이곳에서 느꼈던 감정 또한 말로 설명하기 힘들다. 기억에 강렬히 남아 추억으로는 꺼내볼 만한 가치가 있지만 절대로 다시 직접 느끼고 싶지는 않다.


자대 배치

이때의 감정은 이전 브런치 글에 잘 설명이 되어 있다.


이등병

모든 것이 낯설었지만 논산 보다는 훨씬 정서적 안정을 느꼈다. 이곳에서 일 년을 넘게 생활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정말 까마득했지만, 한편으로는 논산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주위를 둘러싼 겨울산의 풍경이 아름다워 보였고 도심에서 벗어나 단체생활을 하는 것이 처음이므로 오히려 새로운 경험과 도전을 해볼 수 있으리라는 긍정적인 생각과 호기심을 갖고 행동했다.


일병

군대에서의 업무는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려고 해도 내게 도움이 될 만한 가치를 가치를 갖고 있지 않다. 톱질, 낫질, 화포 시동 걸기 등의 체험은 앞으로 밖에서 하기 힘든 특별한 체험이 되기는 하겠지만 그것들이 정신적인 혹은 신체적인 성숙을 돕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나는 즐거움을 공부에서 찾았다. 일과를 마친 뒤 사이버 지식 방에서 물리 문제를 풀고, 자기 전에 도서관에 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이 참으로 큰 행복이었다.

일병 땐 항상 긴장해야 했고 자질구레한 일들을 많이 했다. 하기 싫고 귀찮아도 눈치를 보며 빨리빨리 움직여야 했다. 수동적인 삶에 가끔 회의를 느끼기도 했지만 오히려 이 덕분인지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가장 활발하고 부지런해져서 공부도 잘 되고 글도 자주 썼다. 미숙했지만 열정은 넘쳤다.


상병

선임이 어느 정도 빠져나가고 주 업무를 담당하는 시기였다. 이 즈음에 후임이 들어왔다. 언제나 친절한 선임이 되고 싶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육체적으로 힘들지 않았지만 혼자 짐을 짊어져 정신적 중압감을 자주 느꼈다. 가끔 후임이 답답하기도 했다. 원래 화를 속에서 참고 혼자 괴로워하다가 누그러뜨리는 성격인데, 언제부터인가 속마음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짜증과 화도 많아졌다. 사회에 있을 때 오랜 시간을 들여 다듬고 가꿔온 내면과 도덕성이 순식간에 무너졌다는 생각에 괴로울 때가 있었다. 그렇게 악순환이 반복되며 스트레스는 쌓여만 갔다. 살면서 처음 느끼는 우울감도 가져봤다.


병장

지칠 대로 지쳐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었다. 병장 초까지만 해도 그 압박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지만, 이제 후임에게 자리를 넘겨주라고 지휘관께서 한 마디 내뱉는 순간 모든 긴장이 풀리고 평온을 되찾았다. 어쩌면 그 중압감은 나 스스로 만들어 악화시켰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자리를 넘겨주라는 그 선언이 마치 강한 바람이 되어 무거웠던 돌탑의 돌들을 다 떨어트려 주었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어떤 임무를 수행해야 할 때 나를 찾는 일도 분명 줄어들었다.

그리고 이제 전역이 다가와 거의 모든 일에서 손을 떼었다. 이제 후임들이 주가 되어 임무를 하고 나는 휴무를 써서 컴퓨터 앞에 앉아 전역 후 계획을 세우고 있다. 갈 때가 되니 내가 항상 걱정하던, 짜증을 내던 성격이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고 후임과 대화를 할 때 벽도 약간 물어진 것 같다.


이리하여 나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공허한 듯하면서도 후련함에 가까운 무명의 감정을 느끼게 된 것이다.


글을 쓰고 보니 군생활은 인간의 인생사의 축소판이라는 생각이 든다. 두렵고 호기심 넘치던 어린 시절을 겪고 방황하다가 열정 가득한 청년이 되고 사회적 책임을 떠받드는 어른이 되고 결국에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나갈 준비를 한다.


 요즘 거울을 보면 얼굴이 예전과 달라진 것 같다고 느낀다. 가끔 부모님께서 보내주시는 가족들의 사진에서 안 보이던 주름이 보이는 것 같다. 시간이 흐른다는 것, 그 사실은 가끔 씁쓸함을 준다.

내가 나가도 군대의 시계는 계속 돌아갈 것이다. 내가 나가면 내 삶의 시계도 여전히 돌아갈 것이다.

내가 군대에 있든 사회에 있는 집에 있든, 누군가는 떠나고 또 누군가는 새 일원이 될 것이다.


어느 집단을 봐도 떠나는 자와 오는 자가 있다.

젊은이가 떠난 자리는 다시 채워질 것이다.

내가 죽어서 빈 자리는 어떤 태어난 자가 채울 것이다.

어떤 인간이 떠나면 그 자리는 다시 인간에 의해 채워진다.

나는 인류와 인간에 대해 생각한다. 혹자는 끝이 있다고 생각하여 두려움을 느끼는 반면, 넓은 시야를 가진 자는 사실 순환하고 있는 것들에서 아름다움을 찾고 애정을 느낄 것이다.


이제 시간의 흐름에 이끌려 군생활이라는 짧지만 임팩트 있는 단계를 마치고 학생으로서, 연구자로서의 삶을 떠돌 않을까 싶다.

이 넓은 세상에서, 그 위대한 시간의 흐름에 비하면 이 짧고 보잘것없는 순간에 괴로워하던 내 모습은 얼마나 하찮은 것이던가. 부끄럽다.

그러나 부끄러워서 다행이다. 부끄럽지 않았다면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개선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으려 했을 것이다.


좋아 이 정도면 만족스럽다. 쓰지 못했던 글을 뭉뚱그려 적은 감이 있지만 어떻게든 기록해내었다. 이리하여 브런치에 내 군생활을 모두 담아내었다. 어쩌면 전역신고를 하거나 위병소 밖을 나올 때 또 글을 쓰러 오고 싶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에필로그의 영역에 두는 편이 나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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