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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Apr 27. 2024

목우씨의 긁적긁적(80)

제80화 : 첫사랑의 편지(12)

@. 제게 학교는 어느 학교 어느 때든 첫사랑이었고, 그때 제자들이 보낸 편지도 당연히 첫사랑의 편지입니다. 오늘 편지는 지금부터 35년 전의 편지라 너무 이르지 않나 망설이다가 배달합니다.


  
       * 첫사랑의 편지(12) *


  샬롬!

  선생님, 너무나 좋은 새벽입니다.
  방학이란 핑계로 주저앉았던 저를 일으키려고 막 먼지를 훌훌 털고 있습니다. 선생님께 너무나 연락이 없었던 것 같기에 죄송스런 마음으로 조심조심 이 펜을 듭니다. 그저 선생님 가정이 평안하리라는 조그만 믿음으로.

  이렇듯 이른 새벽엔 펜과 원고지가 있으면 나름대로 생각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이 주어질 것 같습니다. 3학년이라는 이유로 너무나 나태했고 교만하여 선생님께 순종할 줄 몰랐던 우리들의 잘못을 이 자리를 통해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이제 친구들도 거의가 취업이라는 벽을 넘어서고 있고 저 또한 머지않은 날 그렇게 될 것이라 생각하니 그저 학생으로 남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처음엔 그처럼 OO공업고등학교에 온 것을 후회했지만 지금의 저로서는 단지 모든 것에 감사할 뿐입니다. 남녀공학이라는 이유로 제 행동에 좀 더 조심을 주었고, 또 남학생들의 나쁜 습성들, 그리고 저와의 차이를 다른 친구들보다 많이 깨우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나름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시간 또한 넉넉히 가질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믿음생활에 변화를 가져다 준 기회이기도 했답니다. 정말 사람이 살아가면서 불평 불만할 것은 하나도 없는 것 같습니다.

  요즘 제가 느끼는 것 중에 가장 큰 것이 '감사'랍니다. 선생님께서도 감사생활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계시다는 걸 가끔씩 저도 느낄 수 있었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고 하신 말씀을 되새겨봅니다.





  참, 저희 교회는 7월 31일부터 8월 3일까지 부산 고신대학에서 부산의 친구들이랑 700여 명이 모여 수련회를 가졌답니다. 너무나 뜨거운 곳에서 우리는 또 한번 주님의 인자하심을 배웠고, 태풍의 방향까지도 돌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우리 700여 명의 기도소리를 하나님은 들으신 것입니다. 캠프파이어 시간이었답니다. 그런 체험을 가진 우리들은 정말 천국에나 온 듯이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쁨의 춤을 추었습니다. 처음 보는 얼굴들이 서먹하지 않았고, 모두가 형제요 자매였지 그외에는 어떠한 것이 될 수도 없었습니다.

  수련회를 마치고 돌아온 저희 교회 학생회 형제자매들의 변화된 생활을 보며 우린 주님의 일꾼, 열심 있는 일꾼들이 될 것임을 믿습니다. 물론 선생님께서 봉사하고 계신 성당에서도 수련회 다녀오셨겠지요. 모두가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는 믿음들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성당에서 미사 드릴 때 여자들만 흰 수건을 쓰는 것을 아주 궁금하게 생각했었는데 [고린도전서] 11장을 보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한지도 꽤 시간이 지났습니다. 새벽기도회 다녀온 후에 바로 시작한 것이 아침식사 시간까지 왔습니다. 졸작을 국어선생님께 보내드린다고 생각하니 부끄러움이 앞서지만 순박한 제자의 마음이라 생각하니 한결 편합니다. 선생님께서도 그렇게 보아주세요.


  남은 시간도 건강히 보내시고 개학 후에 뵐 때 선생님의 모습이 환하기를 바랍니다.

  1989년 8월 17일 아침
  제자 OOO 드림




  <함께 나누기>

  오늘 편지는 세 가지 면에서 저를 놀라게 했습니다. 하나는 단 한 글자도 수정할 게 없었고, 둘은 '세로 쓰기'에도 글씨의 정교함과 정련함! 셋은 내용에서 보여주는 글쓴이의 품격.

  이 학생은 제가 OO공고에 근무할 때 가르쳤던 소녀입니다. 당시 그 학교는 남자공고였는데, 전자과를 신설하며 그 과만 남녀공학으로 받았습니다. 그리고 소녀는 문예부 학생이라 저랑 자주 만났습니다. 문예부 활동을 아주 열심히 했던 학생이며 언제나 예의 바른 학생으로 기억합니다.

  글 가운데 "태풍의 방향까지도 돌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했습니다"는 내용은 무슨 뜻인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원래 부산으로 오기로 예정돼 있던 태풍이 기도 덕분으로 방향을 바꿔 다른 지역으로 가는 바람에 수련회를 무사히 마쳤다는 의미인 듯합니다.

  신앙심의 깊이가 저보다 훨씬 깊은 소녀는 지금 54세쯤 되었을 텐데 아직도 굳건한 믿음 갖고 있는지, 그로 하여 행복한 생활 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부디 같은 종교 가진 착한 배필 만나 따뜻한 가정 이루어 행복하게 살고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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