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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자갈 Apr 05. 2022

창극 <리어>

물 위에 새로 쓰인 불멸의 비극 04.05


국립창극단 <리어> 03.30 막공 관람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셰익스피어의 희곡 <리어 왕>은 그간 언어와 장르를 가리지 않고 상연/각색되어왔다. 내로라 하는 배우와 연출들의 과업처럼 보이기도 한다. 지금 떠오르는 것만 해도 NT의 리어 왕, 피터 브룩의 리어 왕, 안소니 홉킨스가 출연한 영화 킹 리어, 작년 LG아트센터에서 상영된 아비뇽 페스티벌 올리비아 피의 리어 왕 등이 있다. 한국에서는 작년 겨울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에서 이순재의 리어 왕이 공연되었으며 올해 3월, 국립창극단은 제작진과 소리꾼의 화려한 라인업으로 창극 <리어>를 올렸다. 


창극으로 만나는 <리어 왕>은 그 결과물을 쉽게 상상할 수 없다. 우선 <리어 왕>을 음악극으로 상연한다는 것은, 원작의 절대적인 권위를 무릅쓰고 방대한 대사들을 전달과 습득에 용이한 가사로 간추려야 한다는 뜻이다. 게다가 창극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소리꾼의 창에서 불가피하게 느껴지는 한국의 전통적인 이미지들과 원작의 이국적인 윤곽 (주인공의 이름들, 작품의 배경이 되는 17세기 영국의 황야 등)을 조화롭게 조율하되, <리어>가 보여지는 바로 지금, 2022년의 시대도 고려해야 한다. 또한 이미 여러 버전의 <리어 왕>이 존재하는 만큼 국립창극단의 <리어>는 ‘왜 (하필 또) 리어 왕인가? 왜 우리는 고전과 계속 마주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설득력 있는 답을 제시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리어 왕>에서 <리어>로의 도전에 있어 창극은 장르적으로도 새롭고 주인공을 맡은 배우들 또한 젊은 소리꾼들이라는 특색이 있지만 내용 구성이나 주제 표현의 측면에서 국립창극단만의 한 방이 무엇일지 궁금했다.


그래서 나는 창극 <리어>를 관람하고-

또 하나의 고유한 <리어 왕>이 된 <리어>의 전략들에 대해 써보기로 했다 :)



(1)테마와 무대가 된 물


핵심 전략은 ‘물의 사용’이었다. 배삼식 작가는 물에 대한 노자의 사상을 큰 주제로 잡아 인물들의 욕망과 역동을 그려냈다. “상선은 약수일러니 만물을 이로이 하되 다투지 아니하고 모두가 저어하난 낮은 곳에 처하노라.” (작품 프로그램북 참고) 상선은 아무리 높은 곳에 있어도 아래로 흐르는 물처럼 되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 대사는 <리어> 초반에 왕위에서 물러나는 리어 왕이 세 명의 딸들에게 땅과 재산을 나누어주기 전, 앞으로의 겸손하고도 검소한 태도를 다짐하는 대사다. 리어 왕의 대사이긴 하지만 낮은 곳에 처한 물과 같은 잔잔함과 겸손함은 작품을 관통하는 키워드로 작용하게 된다. 왕을 포함한 다수의 인물들이 이를 놓친 채 자신의 어리석음과 삶을 맞바꾸기 때문이다. ‘상선약수’의 모티브가 된 대사를 원작에서 찾자면, 아마도 1막 1장의 “…노년의 걱정거리 힘 좋은 어깨 위로 훌훌 털어 넘겨주고 가벼운 마음으로 죽음 향해 천천히 기어갈 결심을 굳혔노라.”일 텐데, 배삼식 작가는 이 문장 대신 노자의 사상 한 줄을 추가함으로써 작가 자신만의 방향성을 분명하게 만들었다. 


위의 대사를 기점으로 물과 관련된 대사와 노래가 작품의 적재적소에 배치된다. 어 왕이 점점 미쳐가는 장면에서 죽은 물고기를 보며 평평하고 차가운 죽음에 대해 부르는 노래는 죽은 코딜리어에게 부르는 노래로 연결되기도 하고, 광인 톰으로 변장한 에드거가 외치는 ‘공수레공수거’는 상선약수에서 그 의미가 확장된 단어로 볼 수도 있다. 이처럼 물은 작품과 함께 흐르고 변주되다가 가장 마지막에 나오는 합창에서 “이 고요를 위하여 적막을 위하여 그 모든 소란이 필요했던가 / 잔잔한 네 꿈은 한 줄 바람에도 쉬이 흐려지는도다”라는 가사로 마무리된다. 한바탕의 급류와 추락 끝에 죽은 자와 산 자 모두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적막 뿐이었다.


이렇게 ‘물’을 핵심적인 소재로 가져가겠다는 배삼식 작가의 의도에 맞게 이태섭 무대 감독은 아예 달오름극장 무대 위로 물을 올려버렸다. 오케스트라까지 활용한 큰 무대였는데, 무대 제일 안쪽에서부터 약 50% 이상은 물이 들어와있었다. 2층 맨 뒷자리였던 탓에 물의 힘과 움직임을 크게 느끼기는 어려웠지만 <리어>의 무대에는 약 20톤의 물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배우들은 움직임에 제약이 생겼을지 몰라도 물은 시공간적 배경이자 심리 표현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었다. <리어>는 1600년대 영국이 아니라 그저 어떤 나라의 어떤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해도 될 만큼 작품의 시대적 배경이 모호하게 느껴졌는데, 별다른 세트 없는 무대 위 물의 사용이 그에 기여하는 것 같았다. 물과 땅은 어느 시대에서나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중립적인 무대에서 물은 높낮이가 조금씩 변하고 배우들의 발에 흔들리기도 하면서 작품 속 계절의 흐름과 폭풍우를 시각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러나 물이 진정으로 기능했던 장면들은 배우 개인이 물을 직접 활용하는 순간들이었다. 분노하여 칼을 내던지거나 성공적인 복수를 꿈꾸며 손에 받은 물을 다시 떨어뜨리는 장면, 물에 비친 자신을 내려다보는 장면 등에서 인물들의 욕망과 감정선을 읽을 수 있었다. 물은 자칫 모호한 은유만 남겨 공연에 독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리어>는 물을 활용해야 하는 당위성을 충분히 전달했다고 생각한다.



(2)취사선택과 노래


<리어>는 구성적으로 몇 가지 실험을 했다. 첫째, 코딜리어와 바보(광대)를 1인 2역으로 하고 리어 왕의 충신인 켄트의 비중을 대폭 줄였다. 둘째, 관객들이 주목해야 하는 장면들은 창으로 바꿨다. 셋째, 그리스 비극처럼 코러스를 썼다. 


# 배역

사실 코딜리어와 바보 역을 한 배우에게 맡기는 것은 대단히 새로운 아이디어는 아니다. 가장 최근의 예로는, 이순재와 이연희가 출연한 연극 <리어 왕>에서 이연희가 코딜리어와 바보 역을 맡았다. 학자들 사이에서도 셰익스피어가 코딜리어와 바보를 한 배우로 염두하고 썼는지, 왜 갑자기 바보가 중간에 사라지는지 의견이 분분하다고 한다. <리어>에서 코딜리어와 바보를 1인 2역으로 배치한 이유는, 상징적으로 혹은 이야기 상 실제로 둘을 한 명의 인물로 간주했기 때문일 것이다. 코딜리어가 왕이 데리고 다니는 바보가 되었다가 다시 코딜리어로 죽음을 맞는 것이다. 코딜리어는 매정해보일 만큼 날카로운 지적과 침묵으로, 바보는 터무니없는 말들로 왕이 혜안을 갖도록 인도하며, 마지막 장면에서 리어 왕이 죽은 코딜리어를 안고 ‘나의 바보’가 죽었다고 말을 하기도 한다.


배삼식 작가는 또한 리어 왕의 충신인 켄트의 비중을 대폭 줄여 역할의 이름도 ‘리어 왕의 기사’로 정했다. 원작 속 켄트라는 인물이 갖고 있는 불같은 성격이나 그의 충언들, 리어 왕을 위해 몸을 사리지 않는 행동들에서 딱 ‘충신’이라는 이미지만 골라내어 장면 전개에 필요한 리어 왕의 기사로 만들었다. 켄트의 비중에 대한 반응들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왕에게 지극정성인 인물을 유지할 거면 켄트를 더 개성있게 살려도 괜찮았을 것 같다. 켄트는 리어 왕이 황야로 내쫓겨 미치고 죽어가는 모든 순간들을 함께 하면서 그를 극진히 보살피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 켄트의 마음을 모르는 리어 왕이 더 답답하고 안쓰럽게 보이게 한다. 켄트를 그저 ‘기사’로서, 마치 많고 많은 리어 왕의 기사들 중 익명의 한 명처럼 무대에 존재하는 것이 아쉬운 부분이었다.


#창극

창극이라는 장르의 무게중심이 소리와 음악에 있기 때문에 <리어>를 보는 관객들은 제작진이 작곡과 작창에 심혈을 기울였음을 체감할 수밖에 없다. 장면의 상황과 분위기마다 변화하는 악기와 장단에 몸을 싣고 작품의 흐름을 따라가게 된다. 이때 비(非)한국인은 결코 누릴 수 없는 언어적 표현력이 돋보인다. 소리꾼 배우들이 ‘~소서, ~로다, ~리, ~여’ 등, 한국의 옛 어미들을 장단에 맞춰 맛깔나게 살리고 단어들을 늘려서 또는 빠르게 붙여서 노래하기 때문이다. 서양의 대중음악이나 뮤지컬에는 부재한 판소리 특유의 음을 흔들고 꺾는 창법을 살려 기존의 <리어 왕>에 ‘한이 서린’ 정서와 ‘어깨춤이 나는 흥’의 정서를 성공적으로 융합시켰다. ‘한’의 경우, 눈을 빼앗기고 진실을 보는 글로스터나 코딜리어의 진실된 사랑을 깨닫는 리어 왕이 노래하는 장면에서 스스로의 우매함을 자책하고 자식의 희생을 슬퍼하는 감정이 목을 찢고 나오는 듯한 통곡으로 객석에 전해졌다. 후자인 ‘흥’의 경우에는 바보의 허무맹랑하지만 뼈가 있는 우스갯소리들과 미친 척을 하는 에드거의 유쾌한 노래가 해당됐다. 이처럼 창극은 제작과 연습 과정은 까다롭지만 한국적이면서도 창작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들은 무리없이 전달할 수 있는 형식이었다.


물론, 어떻게 보면 배우와 관객 양쪽의 입장에서 노래와 음악을 통한 소통이 원작의 비장한 대사들을 발화로 처리하는 것에 비해 편할 수도 있다. 혹자는 치트키 같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리어>는 노래와 음악을 포함한 소리로써 <리어 왕>이라는 무거운 비극을 조금 더 대중적이고 관객이 다가가기 쉬운 작품으로 만들었다. 셰익스피어가 이 극을 올리던 시대에는 사람들이 공연 중 자유롭게 극장을 들락날락할 수 있었지만, 지금처럼 관객들을 어둡고 고요한 좌석에 모아두는 환경에서는 관객의 몰입도가 중요해진다. 특히 <리어 왕>처럼 기본 3시간 이상이 소요되는 작품에는 튼튼한 구성과 그를 받쳐주는 연기력과 시청각적 요소 등이 필요할 것이다. <리어>는 비록 판소리 자체가 2022년의 젊은 관객층에게 다소 낯설 수는 있어도, 장르와 작품의 무게감의 한계를 한국 전통 악기와 바이올린, 첼로 등으로 대표되는 서양 악기 그리고 현대 음악에 쓰이는 신시사이저까지 다양한 소리들을 활용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었다. (거기에 물까지 있어 시각적 요소도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


#코러스

원작에는 없었던 코러스는 작품 중간중간 리어 왕의 기사들 역도 하고 다음 장면에 대해 암시하거나 폭풍우와 전쟁을 표현하는 현란한 동작들을 보여주었다. 작품의 웅장한 분위기에 한 몫한 것 같다.



그렇다면 왜 하필 또 리어 왕이냐. 왜 굳이 창극으로 각색하면서까지 리어 왕을 봐야 하냐. 관극 경험이 아직은 부족하지만 그래도 <리어 왕> 원작을 읽고 아비뇽 페스티벌에서 열린 <리어 왕>을 영상으로 보고 국립창극단의 <리어>를 본 나의 답은 이렇다. 그들의 리어 왕은 나를 다음과 같이 설득했다.


우리는 <리어 왕>을 통해 삶을 담보로 한, 위험하지만 자신에게는 고귀한 선택을 하며 죽음을 맞이하고 생존하는 인물들을 만난다. 선택이 반드시 선과 악으로 나뉘는 것은 아니고 죽음이 반드시 형벌이 되는 것도 아니다. 각자의 계기로 들끓는 욕망과 의지를 계기로 인물들 간의 관계는 조여지고 끊기면서 갈등과 파멸이 일어난다. 선택들이 부딪히면서 연쇄적인 파장을 일으킨다. 그렇기에 우리는 인물의 언행과 타 인물들과의 관계성을 놓고 인물을 다층적으로 분석해보면서 나를 그 상황에 대입해보고 더불어 현재의 나도 돌아볼 수 있게 된다. 참 누구 하나 쉽게 정 붙일 수 없을 만큼 유약하고 모난 주인공들이지만 우리가 전체적인 상황을 바라볼 한 인물의 시선을 선택해도 되고 반대로 그저 관조해도 전혀 상관없다. 이것이 우리가 고전을 계속해서 다루는 이유일 것이다. 다시 말해, 고전에는 특수성과 보편성이 공존한다. 작품이 쓰인 시대와 작품의 배경이 되는 시공간의 특수성, 그에 공명하는 독자들이 느끼는 보편성, 그 속에서 독자 개인이 존재하는 시대와 상황에 작품이 적용되는 특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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