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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어깨가 쑥, 손자가 유치원에서 한 말

by 진향림 최윤순



11월 하순 금요일 저녁, 퇴근 무렵에 남편한테 급히 전화가 왔다.

“유정이 어멈 퇴근하면 애들이랑 성호 네로 와.”

“왜? 무슨 일 있어?”

“일단 성호 네 집에서 만나기로 했어.”

곧이어 작은딸에게서도 전화가 왔다.

“엄마, 애들 뭐해요?”

“막내는 누나랑 놀다가 떼쓰다 잠들었는데.”

“애들 준비시켜 주세요. 엄마랑 함께 언니 집에 가야 해요. 오늘 엄마 팬 사인회 하자고 아빠가 소집했어요.”





원래 토요일 점심에 손주들과 느긋하게 ‘팬 사인회’를 하기로 했었다.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가 많다. 특히 죽음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꼭 인사드려야 할 분이 돌아가신 데다, 주말이라 기차표도 매진되어 새벽 5시 표를 겨우 잡았다.

그 얘기를 들은 남편이 “이럴 때일수록 그냥 넘기면 안 된다”라며 가족 사인회를 급히 앞당긴 것이다.

우리는 ‘배달의 민족’ 답게 음식이 착착착 도착했고, 작은사위는 퇴근길에 예쁜 케이크까지 사 들고 왔다.

모두 모여 왁자지껄했지만, 일단 배부터 채웠다.




그때 남편이 분위기를 잡는다.

“얘들아, 집중! 발레 잘하는 사람을 뭐라고 하지?”

“발레리나요!”

“그럼,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은?”

“화가요!”

“맞아. 그럼 글을 잘 쓰는 사람은 뭐라고 할까?”

“작가요!”

“그래! 오늘 너희 할머니, 최윤순 작가의 팬 사인회가 있을 거야.”

손주들은 이미 엄마가 사 준 책을 한 권씩 들고 있었다. 이제 막 한글을 읽기 시작한 네 살 손자는

‘최윤순’이라는 이름을 또박또박 읽어냈다.


“이제 사인받을 차례니 책을 들고 줄을 서시오!”

한 줄로 쭉 서 있는 모습을 보니, 자꾸 웃음이 흘러나왔다.

‘아, 작가란 이런 기분이구나!’ 가슴이 벅차올랐다. 아이들에게 꿈에 대해서 물었다.

작은 손녀는 발레 선생님, 큰 손녀는 발레리나가 되고 싶단다. 손자는 과학자가 되고 싶다고 하기에 “훌륭한 과학자가 되어 세상을 빛내주세요”라고 적어줬다. 학원 스케줄이 빠듯해 늘 힘들어하는 큰손자에게는

내가 꼭 들려주고 싶었던 문장을 사인과 함께 적어주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다만 시간이 걸릴 뿐이야.”


그리고 막내 손자가 책을 들고 다가왔다. “유준이는 커서 뭐가 되고 싶어요?”

“유어 아이돌(your idol) 작가요.” 그 한 마디에 모두 어찌할 바 모르고 막내에게 시선이 고정되었다.

요즘 ‘케·데·헌(K-pop Demon Hunters)’이 대한민국, 아니 세계적으로 난리다.

생일 케이크도 헌트 릭스나 더피 캐릭터로 고를 정도다.

초1 손녀는 <골든>을 날마다 부르더니 요즘은 피아노로 멜로디까지 친다.

막내는 ‘사자 보이스’가 부르는 힙한 <유어 아이돌>을 흥얼거리며 춤까지 춘다.

그러더니 “유어 아이돌 작가님이 되고 싶다.”라며 그렇게 써 달라는 것이다.




며칠 후 딸이 물었다.

“유준아, 유어 아이돌 작가 되고 싶다고 했는데, 작가가 뭔지 알아?”

“몰라.”

“근데 왜 작가 되고 싶다고 했어?”

“할머니가 최윤순 작가잖아?”

‘아… 이 아이가 할머니처럼 되고 싶다는 뜻이었구나!’

그 마음이 얼마나 고맙던지 가슴이 뭉클했다.

며칠 뒤 유치원에 픽업하러 갔더니 담임 선생님이 뛰어나오며 말했다.

“할머니, 오늘 소원나무에 자기 소원을 쓰는 시간이 있었어요,

유준이가 ‘할머니처럼 작가가 되고 싶어요.’라고 해서 너무 귀여웠어요!”

“여기 좀 보세요, 할머니 뿌듯하시겠어요.” 다른 선생님도 한 마디 건넨다.


(유치원 창문에 붙은 우리들의 소원나무)


처음 누나와 교실 놀이할 때, 유준이의 꿈은 ‘아빠 되기’, ‘엄마 되기’였다.

두 번째로 꿈에 대해 물었을 때, ‘키움 팀 야구선수’가 되겠다고 했다.

며칠 전 할머니 출간 팬 사인회를 하고는 꿈이 ‘작가’로 바뀌었다.

그리고 유치원 ‘우리들의 소원나무’에 정말로 “할머니처럼 작가가 되고 싶어요.”라고 말했단다.


물론 아이들의 꿈은 조금씩 다른 모양으로 수없이 바뀐다.

하지만 어떤 강한 인상 하나가 아이 마음에 작은 불씨로 남기도 할 것이다.

그 불씨가 계속 타오르든, 다른 꿈으로 옮겨가든, 그 자체가 아이에게는 큰 자산이다.

지금껏 늘 판을 깔아주는 건 할머니였다고 생각했지만, 이번만큼은 손주들에게도 색다른 판이 펼쳐진 듯해 어깨가 쑥 올라가고 가슴이 절로 펴졌다.

책을 출간하고 싶다는 꿈이 이루어지니, 나이 든 할머니도 이렇게 기운이 솟는데….

아이들이 자기 꿈을 스스로 실천해 본다면, 얼마나 큰 자신감을 얻게 될까.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188603#n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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