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없는 숲 속에서 커다란 나무가 쓰러졌다. '쿵' 소리가 났겠는가? 안 났겠는가?". 드라마 모든 회차에서 주연 배우들의 내레이션이 흘러나온다. 처음 이 질문을 들었을 때는 양자역학에 대해서만 고민했다. 이 질문은 18세기 영국 경험론 철학자 조지 버클리가 남긴 말을 변형한 것이다. 그는 "존재하는 것은 지각된 것이다."라고 주장했고, 위의 질문을 남기면서 '아무도 지각하지 못했기에 소리가 나지 않는다.'라고 답했다.
닐스 보어는 이 관점을 양자론에 적용해서 "어떠한 사물도 관측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으며, 특성이라는 것도 없다."라고 주장한다. 나는 양자역학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렴풋이나마 개념은 알고 있어 소리가 나지 않음을 확신했다. 하지만 드라마에서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되묻는 것은, 단순한 과학적 사실이나 철학적 사조를 묻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나무가 쓰러졌다는 사실보다 '아무도 없음'이라는 조건이다. 나는 나무가 쓰러진 것을 사건이 발생한 것으로 이해했다. 드라마에서도 시공간을 넘나들며 여러 사건이 발생한다. 사건은 종류와 대상이 다양하다. 성인 여성 시체 훼손, 유아 납치와 살인, 노인 폭행과 감금, 임산부 유기, 보복 살인 등이다. 이는 누구에게나 언제든지 다양한 방식으로 사건이 일어날 수 있음을 전하는 듯하다.
다만 모든 사건은 '아무도 없는' 상태로 발생한다. 가장 핵심으로 다루는 사건은 두 건이다. 구상준(윤계상)의 모텔에서 벌어진 시체 토막 살인과 전영하(김윤석)의 펜션에서 벌어진 유아 살인과 유기다. 두 사건은 '아무도 없다.' 조건이 같지만, 미묘하게 다른 지점이 있다. 구상준은 사건 발생 시각에 잠을 잤다. 따라서 그가 사건에 개입한 것이 최소화된다. 하지만 전영하는 유아가 사라졌음을 이내 알았지만, 이 사실을 모르는 척하고 사건에 소극적으로 대처하면서 의도치 않게 최대한으로 개입한다.
둘은 직접 범죄에 가담하거나 실행한 것은 아니지만, 이를 대처하는 과정에서 다른 선택을 하며 피해의 양상도 달라진다. 구상준은 끊임없이 불운의 관점에서 사건과 피해를 자책하면서 인내한다. 반면 전영하는 불운함과 함께 자신의 선택을 숨기며 고통받는다. 둘 다 '무심코 던진 돌에 맞아 죽는 개구리'라는 것은 같지만, 구상준이 전형적인 피해자로서의 관점을 보여준다면 전영하는 피해자와 범죄자 역할이 중첩되는 양자적인 상태가 된다.
아무도 없기에 이를 대처하는 것은 양심의 영역이 된다. 그리고 독자에게 매번 되묻는다. '아무도 없는' 상황에 사건을 덮으려고 했던 전영하와 사건을 오로지 견디기만 했던 구상준을 대비하여 보여주며, 실제로 이런 일이 우리에게 발생한다면 어떻게 선택할 것인지를 되묻는 것 같다고 느꼈다. “고통받는 범죄자가 되겠습니까? 고통받는 피해자가 되겠습니까?”. 사건을 숨겼던 전영하도 계속된 주변 지인의 상해와 죽음을 맞이하고, 그저 견디기만 했던 구상준도 아내는 죽고 아들은 살인자가 된다.
때로는 구상준의 인내가 지리멸렬하다고 까지 생각하게 되며, 때로는 전영하의 선택에 합리적인 공감을 한다. 하지만 결말로 갈수록 그 무엇도 제대로 된 선택이 아님을 보여준다. '아무도 없는 숲 속에서' 사건이 발생하면, 아무도 관찰하지 못했으니 소리가 나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두 주인공 위로 커다란 나무가 쓰러지며, 쿵 소리는 피해 사실로 숲에 울려 퍼진다.
나무가 당장 내 위로 쓰러지지 않는 이성적인 상태에서야 합리적이거나 합법적인 선택은 쉽다. 하지만 '살인'과 같은 커다란 나무가 나에게 넘어짐을 인지한다면, 오롯이 감내해야 하는가? 아니면 쓰러진다는 사실을 숨기고 못 본 척해야 하는가? 특히 '아무도 없는' 양심의 영역에서 선택이 자유롭다면 말이다. 이 질문은 평소에 굳건한 신념이 있지 않는 한 확신하기 쉽지 않다.
다만 내가 생각하기에 결말을 해석해 보면 '아무도 없는'이라는 조건 자체가 성립하지 않음이 아닌가 한다. 결국 세상에는 영원히 감출 수 있다거나 비밀은 없다. 실제로 구상준은 잠들어 보지 못했지만, 그의 아들은 모든 것을 목격했다. 전영하도 직접 목격한 것은 아니지만, 블랙박스 영상과 레코드 판의 피 등 여러 가지 증거로 '아무도 없는'이라는 전제를 무너뜨린 것이 아닌가 싶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지만 결국은 관측된 셈이고, <아무도 없는 숲 속에서> 나무가 쓰러지자 쿵 소리가 날 수밖에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