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 일어나 봐요. 빨리요, 빨리! 별 진짜 많아요. 별 보러 가요." 나는 7박 8일 몽골 여행을 갔고, 함께 여행 간 동행자가 한 밤중에 나를 찾아왔다. 나는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한 채, 침낭에서 나와 별 보러 갈 준비를 했다. 나는 몽골에 별을 보러 갔다. 이제 쏟아질 듯한 별과 은하수를 볼 수 있다는 부푼 기대에 비몽사몽 겉 옷만 입고 서둘러 나섰다. 내가 기대한 것은 과학 책이나 유튜브에서 봤던 별과 은하수였다. 하지만 '게르'라는 몽골 전통 가옥에서 나왔을 때, 은하수는 보이지 않았다.
빛이 눈에서 멀어져야만 별이 보인다. 나는 빛을 등지고, 빛에서 멀어졌다. 그렇게 3분 정도를 걸었고, 고개를 하늘로 쳐들었다. 눈앞에 펼쳐진 은하수는 과학 책처럼 또렷하게 구분되어 보이지 않았지만, 셀 수 없을 만큼의 별은 손에 닿을 듯한 거리에 있는 듯했다. 친구가 준비해 온 강력한 손전등을 켜고 몽골 여행 후기에서 봤듯이, 다른 사람과 똑같은 사진을 찍었다.
같은 구도에, 같은 조명, 같은 별자리. 사진에서 주인공은 별이나 은하수가 아니었다. 사진에 주인공은 언제나 사람이었다. 나는 주인공이 되어서 사진 찍기보다 손 뻗으면 닿을 것 같은 별과 희뿌연 은하수, 집중하지 않으면 놓칠 수밖에 없는 별똥별의 순간을 그저 눈에 담고 싶었다. 백번을 양보해서 사진의 주인공은 나라고 해도, 나의 SNS 계정에 올리지 않으면 나인지조차도 구분하기 힘든 사진은 나에게 무의미했다.
하지만 함께 여행온 사람의 들떠있는 기분을 맞춰주려고 마지못해 사진을 찍었다. 별을 보는 것은 빛을 등지는 것 외에도 조건이 필요한 셈이었다. 그제야 나는 바닥에 누워서 별을 볼 수 있었다. 내가 누워서 한 시간가량을 별과 은하수를 보는 동안, 함께 여행온 사람은 몇 번이고 사람만 바뀌는 형태의 같은 사진을 찍었다. 나는 죠지 음악을 들으며 별똥별이 떨어지는 보는 동안 생각했다. 순간 떨어지는 별똥별은 사진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나 '별 보러 왔다.'는 목적을 놓치는 것은 이러한 상황에서만 생기는 것이 아니다.
삶에서도 목적을 놓치는 것은 흔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이때 목적을 놓치는 것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목적을 잃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장치다. 꾸준하게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북극성이 필요하다. 별자리를 찾을 때는 북극성이겠지만, 개인에게는 신념이 북극성처럼 길잡이를 할 테다. 나를 명확히 이끌어주는 북극성이 없다면, 어느샌가 별똥별처럼 추락하는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
내가 이번 몽골 여행에서 띄우고자 한 북극성은, 자화상을 직접 그리며 벼린 것을 나와 타인이 감시할 수 있도록 하는 과정이다. 대학생 때 '김세모'라는 별명이 있었던 만큼, 나는 상대를 대함에 있어 뾰족했다. 쉽게 상처 주는 말을 직설적으로 한다던가, 나 위주의 말과 행동을 한다던가, 상대와 관계에 있어 과정의 감정을 나누기보다도 결과의 이해를 강요했다. 자화상을 그리면서 앞으로의 삶에서는 '동그라미'가 되려고 몇 번이나 다짐했다.
7박 8일의 몽골 여행은 이를 끊임없이 되새김하고, 앞으로 삶의 북극성을 띄우는 시간이었다. 어느 장소에 가든 자화상을 들고 사진을 남겼다. 밤하늘에 별은 지구 어디에나 존재한다. 어느 곳에서든 별을 보면 몽골 밤하늘이 떠오를 테고, 몽골의 추억이 담긴 자화상 사진이 연상될 테고, 자연스럽게 자화상을 그릴 때 다짐했던 북극성이 눈앞에 나타날 테다. 북극성을 강렬하게 띄움으로써 내 삶이 더 이상 '세모'가 아니라, '동그라미'로 살아갈 수 있는 장치를 만든 셈이다.
물론 여행의 시간이 길어서 내면 깊은 곳에서 세모의 모습이 종종 나오려고 한 적이 있다. 별을 보기 전에 군말 없이 사진 찍는 것도 그렇다. 예전이라면 상대의 기분과 상관없이, 나의 입장에서 목적과 다른 사진 찍는 것이 왜 불필요한지를 설명했을 테다. 상대의 감정보다 나의 합리적인 이해가 언제나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내가 벼린 끝에 찾은 '동그라미'라는 북극성이 타인을 향해 환하게 방향을 지시했다. 직접 그린 자화상을 들고 몽골의 곳곳을 다니며, 그렇게 나는 나만의 북극성을 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