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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용 Nov 22. 2024

<정년이> 꿈은 내 바닥이고 하늘이여

야반도주

"아빠, 내 가수가 되고 싶다." 아버지에게 장래희망 따위를 말한 적 없기에 더욱 고민하고 말한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단호했다. 누구나 어릴 때는 연예인이 되고 싶어 한다는 둥, 그게 얼마나 힘든 건지 알기나 하냐는 둥, 성공해도 딴따라 밖에 더 되겠나라는 둥. 아버지 말을 들은 나는 가수가 되고 싶은 마음이 그저 사춘기 시절이면 자연스레 겪는 성장통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사회복지학과로 대학교 입학이 결정 났음에도, 즉 성인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가수가 되고 싶었다. 애초에 사회복지학은 성적에 맞춰 쓴 곳일 뿐, 나는 사회복지사가 되겠다고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대학교 입학이 다가올수록 가수를 향한 열망은 오히려 커져만 갔다. <정년이>에서 소리를 하겠다며 야반도주하는 윤정년처럼 나 역시 야반도주를 계획했다. "우리 엄니 손에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나 한번 성공해 볼라요." 나도 그와 같았다.

ⓒ 정년이 of tvN. All right reserved.

KTX는 4,500원이 최저 시급이던 내가 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수능 끝나고 겨울 방학 동안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 나는 서울행 시외버스를 예약했다. 떠나기까지 시간이 길면 고민이 많아져서 두려움에 포기할 것만 같았다. 다음 날로 버스를 예약했다. 무한하던 부산에서의 시간이 하루도 채 남지 않은 시한부의 시간이 되었다. 시한부의 밤에는 친구들과 송별회를 하기로 했다. 갑작스러운 떠남에 친구들은 술집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친구를 만나러 나서려는 참이었다. 오늘이 지나면 성공하기 전에는 부산에 오지 않을 것이라 속으로 다짐했다. 가수로서의 삶을 반대하던 아버지이기에 차마 말도 하지 못했다. 언제 다시 볼 지 모를 것 같아, 아버지 얼굴을 눈에 담아 가려고 했다. 목수인 아버지는 일찍 잠에 들었고, 불 꺼진 방에 가로등 불빛으로 붉게 보이는 아버지 얼굴을 보자 눈물이 쏟아졌다. 그렇게 나는 야반도주를 실패했다.


나는 야반도주에 실패한 이유를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내가 안정적인 직장을 갖길 바랐다. "재용아, 아빠처럼 더울 때 더운 곳에서, 추울 때 추운 곳에서 일할래?" 목수로서 현장직이나 프리랜서의 고됨을 뼈저리게 알기에 자식만큼은 당신처럼 고생하지 않기를 원했을 테다. 아버지는 직업에 귀천이 있음을 입버릇처럼 말했다. 다만 아버지 기준에 따르면 가수는 천함에 가까웠다.



찬란한 꿈을 먹고사는 사람들

나는 아직 철들지 않은 것이라 스스로를 속이며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했다. 일 년간의 대학 생활과 군 생활까지 마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사회복지사는 역시 내 길이 아니었다. 가수 꿈을 한동안 잊고 살았기에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도통 몰랐다. 당시 불안한 마음에 자기개발서를 읽었다. 책에서는 자신을 아는데 해외여행이 도움이 된다기에 무작정 유럽 여행할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운명은 실재하는 듯하다. 아르바이트로 무대 일을 우연히 하게 되었다.


잊었던 찬란한 꿈을 다시금 떠올리기에 무대 일은 부족함이 없었고, 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서울로 향했다. 야반도주는 아니었지만, 실패의 경험이 있었기에 서둘러 서울행 버스에 올랐다. 연고도, 아는 사람도, 가진 돈도 없던 나는 인터넷에서 동거를 구했다. 방 두 개와 화장실이 하나 있었고, 방 하나를 쓰고 당시 돈으로 이십만 원 월세를 내기로 했다. 도착했는데 방은 두 개가 맞고 화장실도 하나가 맞았다. 다만 사람이 나 포함 셋이었다.


<정년이>에서 윤정년이 국극단에서 쫓겨나 서울에서 오갈 데 없어지자 작은 호의에도 사기당한 것처럼, 나도 역시 오갈 데 없는 몸으로서 사기를 당한 셈이다. 찬란한 꿈을 좇을 때, 내 꿈을 먹고사는 것은 나뿐만 아니다. 꿈을 좇느라 얄팍해진 시야를 틈타서 사기 치며 내 꿈을 함께 좀 먹으려는 사람이 있었다. 돈은 부산에서 올라올 때 미리 보낸 것이 화근이었다. 오밤중에 다른 집을 구할 수 없었고, 잘 곳도 없어 생판 모르는 남자와 같은 방을 써야만 했다.


매일 늦은 시간까지 전화 통화와 방 안에서의 흡연 등으로 나는 한 달도 버티지 못하고 집을 옮겨야 했다. 무대 일은 밤늦게 끝났다. 낮에는 집 구하러 다닐 시간이 없었고, 보증금을 낼 돈도 없었다. 나는 신림동 고시원으로 갔다.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로 스스로를 속여가며 견뎠다. 무대 일은 급여가 적었고, 서울의 생활비까지 계산하면 오히려 적자였다.

고시원 방안에서의 식사

퇴근길에 KFC가 있었는데, 간혹 금요일이면 통에 든 치킨을 할인했다. 그것을 사서 고시원 공용 공간인 주방에 있는 밥과 김치만으로 끼니를 때웠다. 며칠이고 치킨을 나눠 먹었다. 주방에 있는 냉장고에 넣어둘 수는 없었다. 그곳에 넣는 순간 공용 음식이 되기 때문이다. 치킨은 나름의 호사였다. 대부분은 참치 캔 통조림과 김치, 조미 김과 김치 등으로 버텼다. 그렇게나 구질구질했음에도 나는 꿈을 먹고사는 것이 행복했다.


<정년이>에서 윤정년은 "먹고살기만 해도 새빠지게 힘든 세상에서 별천지나 쫓겠다고 항게 미쳤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저한테는 그 별천지가 이 세상 버티게 해주는 꿈잉께요."라고 말한다. 나에게 무대에 오른다는 것이 그랬다. 퇴근길에는 함께 꿈꾸는 사람들과 주연 배우를 따라 하며 뮤지컬 넘버를 불렀다. 퇴근해 고시원이라는 2평 남짓한 집에 가면 누가 들을세라 이어폰 끼고, 뮤지컬 영상을 보며 내가 무대에 선 모습을 상상했다.



이제부터 똑똑히 봐. 내가 뭘 어떻게 해내는지.

윤정년은 득음을 하고자 동굴에 들어가 소리를 한다. 하지만 득음은커녕 목이 쉬어 더는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오디션에서 자신의 한계 이상으로 무리를 해 경쟁자가 직관적으로 패배감을 느낄 정도의 무대를 선보이지만, 끝내 피를 토하며 쓰러진다. 나는 숱한 연습 때문은 아니었지만, 무대 위에서 심각하게 다친 적이 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라는 뮤지컬에는 온실이 등장한다.


뮤지컬 무대는 자동화 시스템이나 기계로 무대를 전환하는 경우가 많다. 다만 연출하는 방법에 따라 직접 사람 손으로 무대 전환을 하는 경우가 있다. 온실에는 바퀴가 달렸음에도 솔찬히 무거웠고, 무대 전환을 하던 도중에 온실이 내 발 한쪽을 타고 넘어갔다. 하지만 정적인 상황이었기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공연이 끝난 후에야 팀원에게 내 부상을 말했다.

당시에 발목 양말이 유행했나 봅니다

"와 이거 완전 독종이네? 프로다! 프로야." 감독님의 말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발은 심히 부어올랐고, 멍도 피어올랐다. 나는 무대 의상조차 입을 수 없는 정도였지만, 오히려 영광의 상처라고 여겼다. 병원에 갔어야 했지만, 나는 아픔을 곱씹으며 기억에 강렬하게 새기기로 했다. 언젠가 뮤지컬 배우로 성공해서 경험담을 늘어놓겠다며 태연했다.


나의 성취가 윤정년의 성취에 비할 바 못됨은 명확히 안다. 다만 꿈을 좇는 마음만은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한다. 윤정년과의 동일시에 국극이라는 무대가 뮤지컬이라는 무대와 비슷한 것도 한 몫했을 테다. 그럼에도 전부는 아니다. 비록 무대와는 전혀 관계없는 사회복지사로 살아가고 있지만, <정년이>를 보며 그 시절에 아무 조건도 따지지 않고 꿈만 좇던 내가 그립다. 꿈은 내 바닥이고 하늘이었기 때문이다.


ⓒ 정년이 of tvN. All right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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