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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종필 Jan 05. 2024

무덤 같은 고봉밥

고 배영옥 시인에 대한 글 

글쓰기에 대한 압박일지 모르겠지만, 힘든 시간을 식욕으로 풀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밤늦게 까지 책상에 앉아 습관처럼 음식을 입에 가져다 넣었다. 음식이라기보다는 과자나 빵이나 라면과 같은 인스턴트 제품이었지만, 입으로 들어간다는 점에서 내게는 이것도 음식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체중이 빠르게 늘었다. 오래전에 나를 만났던 사람들은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 과잉된 표현일 수 있으나 지금의 내 모습은 낯설다. 먹는 것만큼 정직한 것은 없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내 몸을 오랜 시간 혹사 시킨 것이다. 그래서 요즘은 음식에 대해 생각하면서 어지럽혀진 몸과 마음을 달래기 위해 노력한다. 대체 음식이 무엇이기에 한 사람의 굴곡진 선을 망가뜨리는지, 무슨 이유로 목구멍으로 매일매일 넘겨야 하는지에 대해 몽상하면서 밥알 하나와 계란 한 알에 숨겨진 시간들에 대해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경험은 일반적인 것이 아니다. 내가 음식을 대하는 태도가 이랬을 뿐이지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다. 세상에 같은 사람이 없듯이, 음식을 다루고 생각하는 방식도 모두 다르다.  


며칠 전 시집 읽기 세미나 〈동네 언니와 형들이 함께 읽는 동시대 텍스트 읽기〉 동료들과 시집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음식 소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보자고 했다. 각자 자신이 좋아하는 동시대 시인들의 시집을 선정해 시인들이 어떤 방식으로 ‘음식’을 먹고 삼키고 호명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해 보기로 한 것이다. 왜 하필 ‘음식’이었는지는 잘 떠오르지 않지만,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먹방 유튜브나 각종 방송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음식 채널이 무엇인가 지나치게 소비적이었고 광기의 현상처럼 과잉된 표정이었기 때문이다. 먹방문화가 한 시대의 불안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 같아, 진단해 볼 필요가 있었다. 오랜 시간을 살아내지 못했지만 먹는 것과 관련해 이렇게 열광적이었던 적이 있었는지 고민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시집 속 음식 장면들을 통해 소비적인 음식 콘텐츠보다는 진중한 음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것 같았고, 더 나아가 진중한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여러 사람들에게 알릴 필요가 있다는 아이디어가 이 프로젝트의 시작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서로 다른 취향과 표정을 가진 르포작가 시인 문학평론가 현직 학교 선생님이 모여 이 작업을 이행해 나가기로 했다. 나 또한 이런 취지에서 배영옥 시인의 『뭇별이 총총』(2011, 실천문학)과 『백날을 함께 살고 일생이 갔다』(2019, 문학동네)을 선택하게 되었다. 지금 현재 2023년이니 동시대에 가까운 시집은 후자에 해당되지만, 배영옥 시인의 시집은 유고시집이라는 점에서 그녀가 생전에 쓰고 퇴고하고 발표했던 작품들을 대상으로 삼게 되었다. 


배영옥 시인의 첫 번째 시집과 두 번째 시집


배영옥 시인이 쓴 작품 중에는 음식과 관련된 작품이 여럿 있지만, 이 작품들은 대부분 죽음을 횡단한다. 어린 시절 엄마를 잃은 상처 때문인지 이 상처를 가슴에 오래도록 품고 시를 썼던 것으로 짐작된다. 읽다 보면 엄마의 부재가 이토록 힘든 것인지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었다. 연민의 감정이 흘러내렸고 언젠가 다가올 죽음에 어떻게 대비를 해야 하는지 시편을 넘길 때마다 안쓰러운 흔적들을 내 삶 속에서 복습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배영옥 시인은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를 어린 시절에 잃어버렸고, 빈 가슴에 언어를 꾹꾹 눌러 담아 반복적으로 죽음을 연습함으로써 습관처럼 둔하게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죽음을 익숙한 대상으로 받아들이는 행위는 이 계절에 없는 엄마의 존재를 받아들이니 행위이니 말이다. 시인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다. 가령, 성묘와 관련된 작품들이 이에 속한다고 본다.    

                     

무덤 간다 

밀린 봄소풍 가듯 

술과 음료수 갖가지 과일과 프라이드 치킨 싸들고 

꽃 한 다발 앞세운 채

무덤 간다 

풀 한번 베고

눈물 한번 베고 

까르르 웃음 한번 베고

조카들은 즐거이 무덤가를 뛰어다닌다 

공복의 잔을 높이 치켜들고 

먹고 마시는 동안

술추렴이 슬픔을 넘는다

무덤 앞에서 보여줄 것이라곤 

식욕밖에 없다는 듯

기필코 잘 먹고 잘살겠다는 그 약속 보여주려는 듯 

한바탕 진하게 떠들고 놀다가 

정승처럼 잘살고 있으니

아무 염려 말라고 망자(亡子)의 곁에 

꽃다발 대신 앉혀놓고

낮술을 붓는다      


              「유쾌한 성묘」 전문      


이 작품은 가족들과 함께 성묘로 향하는 여정을 담은 시이다. 대상이 누구인지 명확하게 서술되어 있지만 않지만, 화자의 엄마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가족 친지들은 일찍 돌아가신 엄마를 만나기 위해 술과 음료수와 과일 프라이드 치킨을 두 손 무겁게 싸들고 꽃다발과 함께 성묘로 향하고 있는 중이다. 무덤에 도착해서는 엄마가 기다린 시간만큼 자란 풀을 베고 눈물도 흘리고 한바탕 웃음을 뱉는다. 그리고 나선 돗자리 펼치고 음식을 먹는다. 엄마에게 무덤 앞에서 보여줄 것이라고는 시인의 말처럼 식욕밖에 없었는지 모른다. 맛있게 잘 넘긴다. 화자는 이런 허무하면서도 황량한 기분을 가슴에 품고 무덤 앞을 서성거린다. 망자에게 잘살고 있으니 아무런 염려 말라는 듯이 당당한 순간을 연출하기도 한다. 그리고 술을 무덤에 붙는다. 엄마가 이 술을 마시지는 못하겠지만, 술을 부음으로써 엄마와 교감한다.      


그렇다면 시인에게 죽음은 무엇일까. 시인의 말처럼 “죽음으로 씻지 못할 죄”(「똥개」)는 없는 것처럼 숭고한 것일까. 죽음의 순간에는 잔혹한 죄도 헐겁게 만드는 힘을 가진 것일까. 시인은 성묘와 관련된 또 다른 작품에서 엄마와의 만남을 적기도 한다. 비록 만남의 장소가 꿈속이었지만, “자박자박/ 맨발로 꿈속까지”(「성묘」) 걸어온 엄마와의 만남을 오래도록 잊지 못한다. 이런 경험 때문인지  죽음은 늘 시인의 주변을 맴돌았던 것으로 보인다. 장의사와 관련된 작품도 그렇다. 언제나 입을 굳게 닫은 장의사의 모습을 묘사하는 과정에서 “아무도 그를 살아서는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며 “나는 아재의 유일한 상속작이자/ 마지막 고객이었다”(「칠성 장의사」)는 발언은 자신 또한 죽음에 근접해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죽음’을 인식하는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이 태어나 결국에는 죽게 되기 마련이고, 이러한 맥락에서 그 누구든 인간은 한 번은 꼭 죽음의 문턱을 넘게 된다. 차이가 있다면 가는 순서가 다를 뿐이다. 다만 배영옥 시인의 작품에서는 이런 죽음의 그림자가 보다 더 빨리 찾아왔고, 이 감정을 응시하는 과정에서 ‘나’의 표정을 완성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여기서 완성은 시가 더 이상 쓰이지 않는 또 다른 죽음과 무관하지 않으나, 사후적으로 완성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시인이 복사기 옆을 지나갈 때, ‘재생’의 가능성을 생각하는 것도 죽음을 응시한 시선과 무관하지 않다. 자신을 똑 같이 복사한다는 것, 나를 복제해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게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야말로 죽음에 근접한 표정이다. 그래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첫 시집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음식’ 관련 작품들도 무덤과 같은 죽음 이미지나 엄마의 이야기로 채워진다.      


어머니는 

먼 남쪽으로 밥 지으러 가서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식은 아랫목은 다신 데워지지 않았다      


식구들끼리 달라붙어 

서로 몸 뒤채며 

체온을 나눠 가지다가 문득,      


달그락달그락 그릇 씻는 소리에 

문 열고 

마당 내다보니      


차고 맑은 우물 속

어린 동생에게 밥 한술 떠먹이고 싶은 

고봉밥그릇이 떠 있었다      


                       「만월」 전문      


시인은 엄마가 “먼 남쪽으로 밥 지으러 가서/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고 적는다. 식은 아랫목은 두 번 다시 데워지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엄마의 부재로 인해 밥을 먹을 수 없을뿐더러 아랫목은 차갑다. 물론, 독자들은 이 시를 읽으며 화자가 밥을 먹지 못해 굶주렸거나 추운 겨울날 덜덜 떨며 지났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게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밥이라고 해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짓는 밥은 다르기 때문이다. 같은 사람이 존재하지 않듯이 특정한 누군가가 짓는 밥은 냄새도 향기도 맛도 큰 차이가 난다. 화자는 이런 밥을 먹을 수 없다고 고백한 것이다. 기분 탓일 수 있으나 이 기분이 사람의 감정을 좌지우지한다. 특정한 공간으로 인해 당신이 위대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있기 때문에 이 공간이 빛나는 것처럼, 엄마가 짓는 밥으로 인해 밥은 집밥이 되고 엄마밥이 된다. 시인은 이 사소하지만 중요한 진실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엄마에 대한 부재는 고통스럽다.      


더욱이 이 고통은 정답고 소중한 것이었기 때문에 배가 된다. 자신에게 잔소리하거나 짓궂은 존재가 아니라 서로 달라붙어 가족애를 느꼈던 사이였다는 점에서 부재는 더 받아들이기 어렵다. 차라니 못난 엄마라면 덜 슬프고 덜 보고 싶었겠지만 그 누구보다도 소중한 존재였기에 시인은 벽을 허물지 못한다. 이런 쓸쓸한 마음을 풀고 살아가다 보름달이 뜨던 ‘만월’ 날 우물 속에 비친 커다란 달을 보며 엄마가 해주신 ‘고봉밥’을 보게 된다. 더 이상 엄마는 밥을 해주지는 못하지만 시인의 간절한 마음 덕분에 엄마와 만나게 된 것이다. 그러니 이 순간을 시인이 놓칠 리 없다. 언어로 담아내는 수밖에. 이처럼 간절하면 어떤 방식이든지 닿기 마련이다. 시인은 이런 ‘죽음’에 대한 인식 때문인지 국수를 먹는 장면에서도 죽음의 그림자를 캐 올린다. 국수를 맛있게 욱여 넘기는 사내에게 “사내는 무덤 파듯/ 국수 그릇을 비우고 있다”(「공복」)는 표현을 통해 ‘고봉밥’과는 대조적인 ‘빈 국수 그릇’을 죽음과 대치시킨다. 이처럼 시인은 죽음 앞에 있다. 어쨌든 이런 감각이 시인의 첫 시집 속에 담겨 있다.      


이 시집이 2011년에 출간되었으니 두 번째 시집이 묶이기 전까지 첫 시집의 흔적이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는지는 두 번째 시집을 읽어 보면 된다. 엄마의 부재로 인한 상처와 아픔을 시로 승화시킨 그의 시 쓰기가 두 번째 시집에서 극복되었을까. 독자입장에서는 그렇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겠지만, 안타깝게도 이 감점은 보다 진득하게 변주되면서 시인을 더 병들게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병은 마음의 병을 의미하지 않는다. 실제 시인에게 찾아온 병으로 인해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이런 사건은 시인을 체념하게 만들기도 했고, 지금 이 순간의 중요성을 부여했다. 요양원에서 ‘다음에’를 소리 내며 헤어지는 모습을 보고 “다음이 다음을 기다리는 줄 모르고/ 기다리는 다음이/ 영영 세상을 등지는 줄도 모르고”(「다음에」)를 읊조린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엄마의 부재로 인한 슬픔이 변주되어 ‘나’로 확장된다는 것을 두 번째 시집을 읽은 독자라면 어렵지 않게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음식과 관련된 두 편의 시를 살펴보기로 하자.     


사람들은 가까운 사이임을 강조할 때 

그 집 숟가락 숫자까지 다 안다고들 한다

그 말이 단순히 숟가락 숫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지천명이 되어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내 생애는 

두레밥상 위에 숟가락을 놓으면서부터 시작되었던 것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는 숟가락들

어제 옆집 아버지 친구는 

서낭당 언덕에서 돌멩이에 걸려 돌아가시고 

건넛집 아이 엄마는 오늘 딸 쌍둥이를 낳았다     


나도 이제 상 위의 숟가락에 숨은 배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나이가 되었지만      


수저통에 가지런히 누워 있는 숟가락을 

상 위로 옮기는 가벼운 노동을

아직 생각이 어린 아이들에게 시킨다 

몸과 생각에 물기가 많은 아이들은 

죽음과 생의 신비가 숟가락에 있다는 것을 아직 알지 못한다      


따닥따닥 말밥굽 소리를 내며      


아이는 상 위에 숟가락을 식구 수대로 가지런히 놓고 있다 눈대중으로 숟가락 숫자를 헤아려본다      


가장 귀중한 숟가락을 


나는 이미 스무 살에 잃었다      


                       「밥상 위의 숟가락을 보는 나이」 전문      


시인은 밥상 위의 숟가락을 쳐다보면서 삶과 죽음의 순환에 대해서 논한다. 죽음이 존재하면 삶이 존재하듯이 우주적인 순환의 원리처럼 밥상 위의 식기 도구들이 놓이는 것이 인생이라고 말한다. “두레밥상 위에 숟가락을 놓으면서부터” 자신의 삶이 시작되었다고 한 말은 그래서 논리적으로 시적으로 딱 맞아떨어진다. 옆집 아버지 친구는 “서낭당 언덕에서 돌멩이”에 걸려 돌아갔으니 친구 내의 식탁에는 숟가락과 젓가락이 제외될 것이고, 건넛집 아이 엄마는 “오늘 딸 쌍둥이”를 낳았으니 아이가 걸어나니거나 앉을 때 즈음에는 남편과 함께 먹던 밥상에 숟가락 두 개와 젓가락 두 개가 자연스럽게 추가될 것이다. 그러니 밥상은 인간의 삶과 죽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표본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시인은 밥상의 이런 진리를 ‘지천명(知天命)’이 되어서 ‘비로소’ 알았다고 고백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부사 ‘비로소’일 텐데, 이런 단순한 진리를 머리가 아닌 온몸으로 체득한 시인의 고백은 독자들의 감각을 확장시킨다.      


무엇보다도 이 시의 마지막 행에서 “가장 귀중한 숟가락을/ 나는 이미 스무 살에 잃었다”라고 고백하는 대목에서는 여전히 스무살 때 엄마를 잃은 상처가 치유되지 못함을 고백하는 듯도 한데, 이 지점은 독자를 아프게 한다. 이처럼 죽음은 받아들여야 하는 대상이기도 하지만 얄미운 존재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죽음은 스무 살에 엄마를 데려갔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수박 먹는 장면을 시로 쓴 작품에서는 “쓸쓸히 혼자 식탁에 둘러앉아/ 쩍 갈라터진 뇌수를/ 빨어먹는다”(「수박」)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는데 이는 ‘수박’이라는 채소를 탐해 죽음으로 이르게 하는 인간의 행위를 비판한다기보다는 먹는 행위를 통해 쓸모가 사라지는 죽음의 모습을 예민하게 인식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이처럼 시인에게 먹는 행위는 엄마와의 관계를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엄마의 부재로 인해 먹는 행위 자체가 ‘행위’ 없음으로 까지 번지는 듯도 하다.    

  

입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한 울음이 

소녀의 얼굴을 삼키고 있었네 

눈물의 뿌리가 자신을 지배하는 줄도 모르고 

오직 우는 것에 최선을 다하는 

어린 소녀      


눈물에 업힌 눈물이 

푸른 이파리를 피워올리는 저녁    

  

그 어린 소녀는 

몇 년 전 내가 버리고 온 내 영혼이었네     

 

                        「눈물의 뿌리」 부분           


무엇보다도 자신을 거울삼아 쓴 이 작품이 그것을 보증한다. 푸른 장례식장 앞에서 “너무나 의무적인 발자국들을” 느껴야 했던 날, 그날 이후로 눈물을 쏟으며 살아야 했던 소녀가 자신이라는 것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배영옥 시인의 다른 작품들이 이 눈물을 증명한다. 유고 시집 마지막 작품은 “나는 아무래도 새들의 나라에 입국한 것이 틀림없다”(「나는 새들의 나라에 입국했다」)고 말한다. 여기서 새들의 나라는 ‘이곳’이 아니다. 시인이 걸어갈 수 있는 “천사들의 나라”이다. 부디 그곳에서 엄마와 함께 따뜻한 고봉밥 한 끼 맛있게 잘 드시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짧은 이 글로 배영옥 시인을 애도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상투적이지만 상투적이지 않는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믿을 수 있다. 배영옥은 그런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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