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루돌프〉(2023)에 대한 리뷰
2011년 3월 11일 일본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그 사건으로 후쿠시마 주변의 원자력발전소가 무너졌다. 후쿠시마 1 원전이 1960년 무렵에 지어졌고, 1970년대 초반에 가동이 시작되었으니 낙후되었다는 점에서 특별히 신경을 썼어야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자연재해로 인해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중요한 것은 원자력발전소가 원자폭탄처럼 한순간에 파괴적인 재앙을 가져다주지는 않지만, 원자폭탄이 가지고 있는 위험 요소를 그대로 안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 핵폭탄과 같은 위태로움으로 인해 공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이 공포는 현재 여전히 유효하다. 무엇보다도 이 공포의 존재는 만질 수 없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공식적인 발표에 의하면 2053년까지 그러니까 앞으로 30년 동안 후쿠시마 오염수가 바다로 방류될 계획이라고 하니 타임머신을 타고 30년 후로 순간 이동해 후쿠시마 오염수 방수 이전과 이후를 과학자나 시민단체가 정밀하게 조사하지 않는 한, 오염수의 공포와 불안을 구체적으로 가늠하기가 사실상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니 오염수 방수에 대한 불안이 더욱더 커지는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오염수 방수로 인해 피해 보는 대상이 지구라는 커다란 행성에 사는 모든 종(種)이라는 점이다. 바다에 방류된 오염수를 먹는 물고기를 다시 특정한 종이 먹는 생태계의 순환 속에서 오염 물질은 배출되지 않고 축적되고 전파되는 것은 물론, 동일한 종족에게 유전의 형질을 물려주며 치명적인 위험을 낳는다. 무엇보다도 일본에 원자폭탁이 피격된 이후, 방사능 비를 피해야 한다는 말이 유행처럼 떠돌았던 것처럼, 방사능 비에 대해서도 또 다시 자유로울 수 없다. 이제 우리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비(雨)나 눈(雪)을 바라보며 낭만적으로 바라볼 수 없다. 적어도 한 세대가 물러나게 될 때까지 오랜 시간 방사능 비와 눈을 떠올릴 수밖에 없겠다.
인류에게 재앙을 가져다주는 후쿠시마 오염수를 일본 정부는 충분한 합의 없이 효율성과 경제성만을 고려해 방출했다는 데 모순적이다. 후쿠시마 원전과 관련해 2013년에 출간된 서경식, 다카하시 데쓰야, 한홍구의 좌담을 묶은 〈후쿠시마 이후의 삶〉에서 다카하시 데쓰야가 지적한 것처럼, 국가가 원전 정책을 주도하면 전문가들이 원전 정책에 대한 안정성을 논리적으로 뒷받침하고, 마지막으로 특정 미디어가 안정적이고 경제적이라고 선전하는 “철의 트라이 앵글”이 문제라고 지적했는데, 10년이 지난 2023년 지금 우리 정부와 일본 정부의 형태를 쳐다보고 있으면, 철의 트라이앵글에서 한치도 벗어나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장면을 목격하고 있으면, 역사의 ‘진보’라는 것이 여전히 유효한지에 대해 회의적이다. 하지만 이런 걱정과 우려에도 불구하고 오염수 방수는 시작되었고, 인류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현실에 직면한 채, 삶을 이어나가야 한다.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 좋은 해결책이 딱히 떠오르지 않지만, 오염수 방수로 인해 직접적으로 타격받는 존재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보면 어떨까. 1945년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의 피하자가 일본인뿐만아니라 그 공간과 장소를 공유했던 수많은 민족이 피해자라는 사실을 알리는 것처럼, 틈에 놓인 존재들에 관심을 가져보면 어떨까. 물론, 이러한 시선 자체도 인간 중심주의적인 태도에서 기인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인간의 손해만을 셈하니 그렇다. 오오타 야스스케의 〈후쿠시마에 남겨진 동물들〉(2013)을 읽어보면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인해, 인간이 없는 후쿠시마에서 굶주리고 병들고 살처분 당하는 동물들의 사연을 확인할 수 있다. 동물들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이처럼 인간은 ‘인간’을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오염수 방수로 인해 잃어버린 것을 각자의 방식으로 적는 과정에서 과거의 잘못된 ‘선택’을 되돌릴 수는 없더라도, 현재와 미래에 보다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우리가 흐름을 바꿀 수 있다. 나의 글쓰기도 이런 목적을 위해 이행된 아주 작은 손짓이다. 이러한 취지에서 김성라의 제주도 해녀의 사연을 다룬 〈여름의 루돌프〉를 리뷰하고자 한다.
이 만화의 화자는 빈 종이를 보면 무엇인가를 그려야 할 것 같은 압박감에 부담을 떨치지 못하는 어린 만화가이다. 그는 방학 동안 제주도에서 해녀 일을 하는 할머니 댁에 방문해 지친 일상을 회복하고자 한다. 서울의 답답한 ‘여름’을 피하고자 야자나무와 담팔수가 있는 제주도로 도망 온 것이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이방인의 눈으로 제주도의 풍경을 쳐다보게 된다. “이곳에서도 깜짝 놀랄 정도로 많은 것”들이 살아가고 있다는 신비한 사실에 놀라며 서서히 적응해 나간다.
물론, 이런 신비한 존재 중에, 가장 빛나는 대상은 자신을 포근하게 돌봐주는 ‘해녀’인 할머니다. 할머니는 하루에 4시간 이상 물질하며 먹고 살아간다. 무거운 망사리를 매일 바다에서 캐 올리지만, 껍데기를 벗긴 알맹이만을 값으로 쳐주니 해녀의 삶이 만만치 않다. 하지만 할머니는 이런 수고스러움이 있음에도 자신의 직업에 만족하고, 일터인 바다를 자랑스럽게 여긴다. 돈도 벌고 손주도 챙겨줄 수도 있으니 뿌듯하다. 종종 바닷속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만나니 해녀로 사는 삶이 의미있다.
이 텍스트에 등장하는 순옥 할머니도 마찬가지다. 몸이 좋지 않아 최근에 물질을 그만두었지만 바닷속에서 오랜 시간 몸을 맡겼던 탓에 육지에서도 발을 멈추지 않는다. 가을에는 동백을 줍고, 여름에는 해녀 식당에서 일한다. 60년 이상 해녀로 부지런히 몸을 놀린 탓이다. 이처럼 해녀로 산다는 것은 바다와 벗 삼아 하나가 되는 짠하면서도 단단한 삶이다. 그런 탓인지 순옥 할머니는 그림 그리는 소년에게 바다의 색이 항상 푸르지 않다는 소중한 진실을 알려주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이런 아름다운 해녀의 삶이 후쿠시마 오염수 방수로 인해 이제 더는 지속되기 어렵다는 점이다. 직업 특성상 직접 바닷물에 노출될 수밖에 없고, 4시간 이상 바다 속에서 일해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바닷물을 먹을 수밖에 없는 위험한 작업 환경에 놓여있다. 육지에서 일하는 사람과는 달리 후쿠시마 오염수 방수에 맞서 최전선에서 일하고 있는 존재가 바로 ‘해녀’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해녀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오염수는 2053년까지 계속해서 방출된다고 일본 정부가 발표했으니, 이런 실존적인 위협으로부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김성라의 만화 〈여름의 루돌프〉에서 확인할 수 있는 화기애애한 해녀들의 삶을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 김성라 텍스트는 직접적으로 이런 문제를 질문하지 않았지만 아름답고 풍요로운 제주도 해녀의 삶이 두 번 다시 펼쳐지지 않을 거라는 점에서 무엇인가 소중한 순간을 담아 놓은 텍스트라는 생각이 든다. 작가 스스로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김성라의 만화는 잃어버린 제주도 해녀의 삶을 만화의 형식으로 이렇게 담아 놓는다. 해녀들은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런 질문만이 계속해서 자리를 맴돈다. 그리고 나의 목표는 이런 소중한 순간을 회상함으로써 후쿠시마 오염수 방수의 문제점을 우회적으로 강조하는 것이다. 독자들께서는 후쿠시마 오염수로 인해 생계와 생존에 위협받는 많은 해녀분들을 떠올려 주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