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면 밤새 쉬었던 몸속에 윤활유가 되어줄 따뜻한 물을 한 잔 마시는 일이 일상의 시작이 되었다. 처음엔 물 마시기 습관이 안 되어 물 한 모금 넘기기도 힘들었는데 이젠 전기포트에 물을 담고 100℃가 되기를 기다리며 물이 끓는 동안 잠시 고요함도 느껴본다.
‘탁’
전기포트에 물을 담고 전원 버튼을 누르면 푸른색 불빛이 들어온다. 전기포트도 오늘 하루를 시작하겠다는
신호를 보낸다.
'새벽을 함께 시작하는 건 나와 전기포트 단둘이구나.'
우리 집 전기포트에는 작은 온도계가 장착되어 있다. 물이 끓을 때 관찰해 보면 처음엔 온도계의 바늘이 조금씩 움직이더니 50℃를 넘어가면 빠르게 움직인다.
그 찰나의 순간들을 보고 있으면 우리네 인생을
보는 것 같다.
10대 시절엔 빨리 20대 성인이 되고 싶었다. 빨리 지나가길 기다린 만큼 시간이 제일 천천히 가던 때가
10대 학창 시절이었다. 학교에서의 시험과 공부를 10대가 되면 끝나는 줄 알고 스무 살이 되기만을 기다리며 10대 시절을 보냈다. 20대엔 영원히 청춘으로만 지낼 줄 알았다. 지나고 보니 20대는 도전과 실패, 그리고 다양한 경험으로 20대를 가득 채웠던 시간이다.
어디에서 패기가 나오고 열정이 나온 건지
그래서 청춘이라 하는 건지 가끔은 20대의
청춘이 그리울 때도 있다. 30대엔 육아에 집중하다 보니40대를 맞이할 준비도 없이 빠르게 지나가버렸다.
어느덧 40대가 되었고 40대 현재는 사춘기 시절보다 지독한 사춘기로 나를 찾아가는 중이다.
불혹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40대임에도 가끔 상황을 따지며 흔들리는 나를 발견할 때가 있다. 30대엔 걱정하지 않았던 부모님 건강 문제와 우리 부부의 노후 문제 아이들 대학 학비까지 현실적인 문제들이 40대엔 보이기 시작했다.
작년 아버님께서 뇌출혈로 쓰러지시면서 미래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 만약 친정부모님이나 어머님이 편찮으시다면...'
'만약 노후 준비가 안되어 자식들에게 우리 부부가
부담이 된다면...'
'만약 아이들 학비 준비가 안되어 아이들 꿈을 포기해야 한다면...'
만약이라는 가정 속에 지금의 상황을 바라보니
귀차니즘이 심한 나를
계획형 인간으로 살아가도록 만든다.
전기포트의 온도계 바늘이 0에서 50℃가될 때까지는 천천히 움직인다. '언제 물이 끓을까?' 하는 조바심으로 기다리다 50℃가 지나면 온도계의 바늘이 100℃를 향해 2배속 빠르게 지나간다. 우리의 인생처럼 50세 이후로는 하루가 빠르게 지나가는 것처럼 전기포트의 온도계도 그러하다. 아직 마주하지 않은 50세 이후의 삶이지만 100세가 되기까지는 세상의 지혜를 경험하고 배우느라 나의 성숙도도 100℃ 끓는 물만큼 높아질 거란 생각이 든다. 반대로 불필요한 욕심은 0에 가까워지지 않을까 싶다.
물이 100℃가 되어 다 끓게 되면 전원 버튼이
제자리를 찾아간다.
따뜻한 물 한잔을 준비하고 아직은 천천히 움직이는
40대의 나를 성숙한 50대가 되기 위한 시간을 만든다.
조금 더 뜨거운 어른이 되고 싶은 나를 찾은 순간이다.
물이 끓는다는 건 나에겐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과도 같다. 금방 100℃가 되지 않듯 100세가 되어야만 가질 수 있는삶의 지혜로움도 당장 갖지 못한다. 100℃가 되는 어른이 된다면 따뜻한 물 한잔처럼 내 곁에 있는 이들에게 따스함을 전해줄 수 있는 진짜 어른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