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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yuhayoung Feb 15. 2024

우리 중 누가 부처가 되는가

이것은 종교가 아니라 결혼에 관한 이야기

친구와 오랜만에 만났다. 하루 걸러 하루 연락하며 일상을 공유할 정도로 가까운 친구다. 우리 이야기는 소위 걸 토크(girl talk)다. 연애에서 비롯되는 아주 사적인 이야기를 주로 나눈다. 술을 2년 정도 끊다 다시 마시게 된 후, 이 친구와는 처음 마시는 술이었다. 두 볼이 발그랗게 달아올랐고, 알 수 없는 편안함과 강남 한복판에서만 느낄 수 있는 미세한 긴장감 속에, 싫지만 좋은 기분 같은 것이 명치께에 몽글몽글 만져질 듯할 무렵이었다. 우연히 영화에 관한 이야길 꺼내게 되었다.


연휴 마지막 날, 여유를 만끽하며 남자친구와 넷플릭스에서 두 편의 영화를 보았는데, 그중 한 편이었다. 제목은 <사바하>. 이 영화를 영화관에서도 보고, 어느 영화 채널에 방영되는 걸 보았던 것도 같다. 이번에 세 번째 보는 참이었다. 공포영화를 전혀 못 보는 나는 기이하고 섬뜩한 장면이라면 눈을 꼭 감고 그 장면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다시 보기를 반복한다. 소리조차 무서울 때는 귀도 틀어막는다. 어쨌든 남자친구에게 '좋아하는 영화지만, 무서워서 혼자서는 못 보는 영화라 같이 보고 싶다'고 했고, 그는 흔쾌히 그러자 했다. 그는 내 말을 듣고 공포영화라고 짐작한 것 같았다. 누군가에게는 아닐 수도 있지만, 적어도 나한테는 공포영화가 맞으니까 틀리게 생각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 영화가 정말 '공포영화'이기만 했다면 이것을 내가 세 번씩이나 볼 수가 없다는 것도 함께 짐작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영화는 생이 고통일 수밖에 없는 중생들이 신에게 끊임없이 물음을 던진다. 크리스마스에 관한 주인공의 대사가 그러하고, 그를 돕는 스님의 불교에 관한 설명들도 그러하고. 그로테스크한 비주얼적 전개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이 들 만큼 엄청난 철학적 통찰이 드러나는 영화다. 오히려 이러한 겉포장과 속에 내용물이 너무 다르다는 이질감이 이 영화를 더 빛나게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락성으로만 영화를 평가한다면 이도저도 아닌, 공포영화도 스릴러도 아닌 애매함이 있을 수 있고, 그 부분을 배재하고 본다면 긴 여운이 남는 상당히 괜찮은 영화다. 그래서 나는 당연히 후자를 기대하고 함께 영화를 보자고 했던 거다. 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돌아오는 답변은 "지루한데…"였다. 내가 느낀 것을 함께 나누지 못하는 데 대한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심지어는 '이렇게 대놓고 느끼라고 영화는 이것저것 다 보여 주는데 이걸 못 본다고? 어째서…' 같은 실망감이 물밀 듯이 일었다.


친구에게 단순히 영화를 추천해주고 싶어서 입을 떼었다가, 영화 취향이 다른 커플은 어떻게 해야 할까?로 이어졌던 대화가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토론이 되어버렸다. 친구와 내가 A와 B의 입장에서 하는 토론은 아니었고, 우리는 A라는 곳에 있는데 B의 영역에 있는 상대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관한 열띤 수다였다. 친구도 헤어진 애인과 똑같은 경험이 있다는 것이다. 문제의(?) 영화는 브래드 피트가 열연한 <파이트 클럽>이었다고 한다. 나는 제이크 질렌할의 <사우스포>라는 영화만으로도 감동을 받는 수준이니(포털 사이트 평점이 낮은 편이다), 명작으로 평가되는 영화는 오죽 더 할까. 친구와 나는, 어떤 것을 보거나 듣거나 경험했을 때 생기는 감정은 결국 경험에 의한 공감이고, 삶을 통찰하는 예술 작품에 깊이 빠져 들지 않는 이들은 소위 공감능력이 떨어지거나 아니면 그것이 제 살결에 와닿을 만큼의 고통스러운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기 직전이었다. 그런데 이건 틀린 질문에 대한 틀린 결론이다. 진짜 질문은 '지루하다는 평가는 어떻게 나오는 것인가?'보다 '지루하다는 말을 꼭 굳이 입 밖으로 내는 것은 과연 어떤 사고에 의한 것인가?'였어야 한다. 작품 자체의 예술성을 평가하는 것이 공감능력과 관계가 아주 없지 않겠지만, 그보다 더 실생활에 필요한 공감능력은 지금 당장 눈앞에 있는 사람과의 대화에서 더 중요한 것이니까. 두 번이나 본 영화를 세 번째에 함께 보고 싶어 하는 상대가 이 영화를 얼마나 좋아하고, 함께 감동을 나누고 싶어 했을까? 같은 생각이 전혀 떠오르지가 않는다는 것은 무얼까. 입력 값이 '영화 어땠어?'이기에 출력 값이 '지루했어'가 나온 것은 어떤 모양의 회로로 제작되었기에 가능한 것일까. 나는 사용설명서를 읽고 또 읽어도 모른다. 왜냐하면 사용설명서가 영어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농담이다. 그냥 말도 안 되게 띄엄띄엄 받아들여진다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발 나아가서 드는 의문. 정말 공감능력의 '능력'은 고유의 재능이며, 그것의 수준은 평가가 가능한 것인가? 그리고 그것이 실제 '능력'이라면 어떤 방법으로 향상할 수 있는가? 그리고 도대체 이런 생각을 하는 나는 어떻게 생긴 회로를 뇌 속에 탑재하고 있는 것일까…?


쉬이 오르내리는 말이 있다. 여자는 공감을 애걸하고, 남자는 사실 관계와 해결에 목을 맨다는 것. 지겹도록 진부하지만, 달리 새롭고 더 기발한 표현을 찾기도 힘든 말이다. 친구와 십수 년 간 비슷한 이야기를 여전히 즐겁게 할 수 있는 이유도 우리 A들은 공감을 우선하고 그것을 풍부하게 사용함이고, B들이 여전히 굳건하게 우정을 유지하는 비결도 서로서로 무엇인가 잘 해결(?)해주기 때문 아닐까. A들끼리 문제가 없고, B도 B들끼리 문제가 없는데, 왜 굳이 A와 B는 함께하려 드는 것일까. 그리고 왜 A인 나는 B인 그에게 공감능력 수준이 향상되기를 바랄까. 이에 관한 생각이나 현상이 이제 서로에게 폭력적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 않는 것도 폭력이고, 해달라고 요구하는 것도 폭력이다. 애초에 둘 다 단 하나로써의 완성형이 되지 않는 것이다. A와 B는 여전히 다르고, 앞으로도 변함없이 다를 것이다.


친구를 만나고 온 다음 날, 친구가 오전부터 어느 유튜브 영상 링크를 가타부타 말도 없이 문자로 보내주었다. 이혼 전문 변호사가 유명 토크쇼에 나와 결혼생활에 관해 이야기하는 영상이었다. 20여 분 짜리 편집 영상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해하려고 하지 말아라, 그냥 받아들여라'이다. '이해하기 위해' 스무고개를 하는 사람과 네 마디 안에 '문제 해결을 하려는' 사람이 합을 이뤄 한 집에 사는 것이 결혼생활이다. 결코 가능하지 않을 것 같은 이 사실을 납득해야 하는 것이야 말로 결혼의 무시무시한 실체이고, 이것이 인간이 평생 고행을 한다 해도 벗어날 수 없을 정도의 업 아닐까? 깨달음의 경지에 올라 부처가 되는 수준의 미션이, 결혼생활에 주어진다는 것을 영화를 통해 알게 되었다…. 참 <사바하>는 다시 생각해 보아도 굉장한 영화다.


어디에서부터 시작을 해야 할까? 나에게 어떤 것이 행복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이 항해는 선로를 벗어나 좌초되고야 말 것이다. 내가 바라는 상대의 모습이 아니라, 나의 모습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A는 난해하고, 이를 B는 평생에 걸쳐 해결하려 들 것이라는 걸 이해하려 애쓰지 말고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 A인 내게 주어진 숙제이다. 하늘이 왜 빨간색이 아니라 파란색인 걸까, 묻는 것이 과학자가 아닌 사람에게 무슨 의미가 있나. 그러니 무모하지만 부처가 되기를 도전하자. 최소한 내가 깨달아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차근히 생각하고 나열이라도 해 보자. 글을 쓰면 자신에게 솔직해질 수 있다는 어느 작가들의 말을 일단 믿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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