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의 시대에 내 삶을 지켜내고 내 서사를 지켜내기
배경사진 출처 : 구글 북스
★★★★
존재하나 침묵한다. 언어를 박탈당하고 다른 삶의 형식을 그려낼 수 없는 서사의 위기 아래 살고있다.
<피로사회>를 쓰신 한병철 작가님께서 쓰셨는데 특이하게도 독일어로 먼저 작성하시고 이후 한국어로 번역된 책이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직면한 서사의 위기에 대한 철학책으로 처음 읽을 때는 글을 읽는 것만도 벅찼다. 다행스럽게도 비슷한 내용이 반복되는 서술 방식, 뒤로 갈수록 상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문장들, 그리고 독서모임이라는 강력한 동기 덕분에 완독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며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생각들이 부유한다.
“노하우의 시대가 아니라 노웨어의 시대다”, “기억보다 기록이 중요하다”, “너의 머리를 믿지 마라”, … 개발자로 일을 하며 나는 점차 기억하기보다 기록에 의존하기를 선택했고, 노션 페이지는 갈수록 늘어난다. 망각을 두려워할수록 기록에 의존한다. 나중에 다시 들여다보지 않을 확률이 훨씬 높다는 것을 알아도 ‘혹시 모르니까’하는 생각에 기록을 멈추지 않는다. 점차 많은 것이 기록되지만 나는 기록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은 기록에 밀려 퇴화한다. 내 글, 말, 행동은 점차 삶을 이야기하지 않고 단순히 정보를 소비하고 데이터를 생산하고 있었다는 자각이 밀려온다. 시대의 변화를 따라갔을 뿐이라고 생각해 보지만 그럴수록 나는 AI에 대체되어 갈 뿐이다. 정보의 시대에 내 삶을 지켜내고 내 서사를 지켜내는 것, 서사의 위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생략한 틈 속에서 이야기할 여유를 찾아야 한다.
책의 내용을 되새기고 메모한 내용 중 일부를 발췌해본다.
내 생각과 느낌, 감정을 말하지 못하고 정보를 내뱉는 사회의 끝은
서사 없는 ‘텅 빈 삶’이다.
우리에게는 서사가 필요하다. 삶은 이야기다.
이야기할 능력은 위축되어 언어를 박탈당하고,
정보를 설명하는 수식만이 살아남는다.
올바른 경청은 타자를 타자성에 그대로 두는 것이다.
모든 것이 소비로 환원되어 다른 삶의 형식을 그려낼 수 없다.
여기에 서사의 위기가 있다.
2023.1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