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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키운 아이 Oct 11. 2023

기러기는 가을에 남쪽으로 건너간다

D-day 100, 이와 잇몸 사이

8누구나 한 번쯤 패기 넘치는 20대를 거치며 꿈꾸는 것들이 있다.

‘나고 자란 곳을 벗어나 낯선 먼 이국땅에서 살아봤으면..’ 하는 바람이다.

물론 집돌이, 집순이는 예외다.

하지만 집순이인 필자도 한때는

‘파리에서 3년만 살아보면 소원이 없겠다’는 말을 주문처럼 입에 달고 다녔다.

마치 반복해서 말하면 언젠가는 이뤄질 꿈처럼 말이다.

20대 때 온갖 아르바이트를 하는 동안

친구들이 한 달씩 유럽 배낭여행을 다녀올 때마다 사진으로 엿본 유럽의 풍경은

동화 속 한 장면처럼 남아 해묵은 바람이 되었다.

그 오랜 꿈은 바야흐로 신혼 생활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지난 2012년 2월,

유독 추운 파리의 겨울에 시작됐다.

결혼식을 마치고 두 달여 뒤,

우연한 기회로 남편에게 프랑스 파리 장기 출장의 기회가 찾아왔다.

사실 그럴 필요는 없었지만 내심 미안해하던 남편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방송작가란 직업의 특성상 제작기간 후

몰아서 긴 휴식을 취하는 시간을 이용해 이른바 ‘내돈내산 파리여행’을 하면 어떻겠냐는 것이다.

단, 조건이 있었다. 공동 가계에서 여행비용을 사용해 혼자 여행하는 것은 동의하지만,

본인은 회사 사람들과 여럿이 함께 떠나는 출장이기 때문에 나와 시간을 보낼 수 없으며

중간에 한 번쯤 만나 저녁을 먹거나 또는 자신도 쉬는 주말에 근교로 여행을 같이 갈 수 있다는 것.

처음에 든 감정은 의외로 서운함이었다.

’판관 포청천 나셨네, 공과 사를 구분하는 건 좋지만 이렇게까지 단호하게 조건까지...‘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을 마치 각서까지 받아낼 기세로 단호하게 듣는 것에 대한 반감이랄까.

그러나 반감이 잦아들자 시간이 지날수록

무척 고마운 제안이라는 걸 깨달았다.

처음엔 파리에 대한 동경이라기보다는 단순히 유럽여행에 대한 막연한 바람이라

고심 끝에 신혼여행도 이탈리아를 선택했는데, 우리는 다른 나라를 섞는 대신 이탈리아 여러 지역을 두루 보기로 결정했더랬다.

당시엔 매우 만족스러웠지만 떠나기 전

이웃 유럽 국가들을 경유할 것인지

꽤 오랜 토론을 했던 사안이기에

프랑스 여행은 여전히 오랜 숙원 중 하나로 남았다.

그렇다! 무려 12박 13일 동안 프랑스를 나홀로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기회였던 것이다!

나의 ‘파리 앓이, 일명 파리 타령‘은

그렇게 시작됐다.


‘Donne-mei de l’eau(물 좀 주세요)’

기내에서 컵라면을 제공한다는 말에 혹해 에어프랑스 비행기 표를 끊은 나의 선택은

결국 라면보다 잠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했는데 바로 옆자리에 앉은

프랑스 아저씨 덕분이었다.

방위 산업 관계자로 한국에 출장 차 방문했다 귀국한다는 인도계 프랑스인 아저씨는

이륙 직후, 첫 번째 프랑스 여행이라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열혈 불어 선생님으로 변신했다.

프랑스 사람들은 영어를 잘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적어도 생존 필수 불어 정도는

반드시 알아야 한다는 이유였다.

1부터 10까지 숫자를  두어 번 세며

발음을 따라 하라고 한 뒤,

그는 암기 시험까지 보게 했는데

더듬더듬 전부 외우지 못하는 제자를

어찌나 근엄하고 진지하게 바라보는지,

그 순간만큼은 열등생이 된 기분으로 결국 나는 간절하게 한 번만 더 들려 달라고 부탁해야 했다.

세 번째 기회에 겨우 숫자 외우기 시험을 통과한 후 한숨 돌리려던 그때, 2교시가 시작됐는데

‘실례합니다 ‘와 간단한 인사를 배우는 시간이었다.

특히 그가 강조한 것은

‘Donne-mei de l’eau(돈 무아 드 루)’라는 말이었다.

바로 ‘물 좀 주세요’라는 뜻인데 평소 물을 잘 안 마시는 내 입장에서는 의미를 알고

억울한 기분도 들었지만

암기 시험에 통과하기 위해  

애써 ‘돈을 모아야 물을 준다 ‘를 의미를 부여해 간신히 외우는 데 성공했다.

약 한 시간가량 중간중간 기습적인 숫자 암기 시험을 치르며 기를 쓰고 외우는

나의 모습이 기특했는지

함박웃음과 엄지를 치켜드는 아저씨의 모습을 보고 잠시 우쭐했던 것도 같다.

그런데, 승무원을 불러 세운 아저씨가 불어로 뭔가를 부탁하는 것이 아닌가?

아.. 불길한 예감은 왜 빗나가질 않는 건지,

이윽고 승무원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실습 시간이었다. 분명 방위 관련 업무를 한다고 했던 아저씨의 교육열은 맹자 엄마를 능가했다.

눈썹을 으쓱하는 아저씨를 보며 나는 조금도 목이 마르지 않았지만 눈치껏

‘Donne-mei de l’eau(물 좀 주세요)‘를

그가 만족할 때까지 큰 소리로 누차 말해야 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승무원이 활짝 웃으며 나에게 물을 건네자마자  

갑자기 그녀를 포함해 나를 둘러싼 좌석의 승객들이 전부 박수를 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 하필 내가 앉은자리의 주변 사람들은 대부분 프랑스인이거나 적어도 불어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던 듯하다.

열혈 선생님과 자존심을 걸고 필사적으로 암기하는 열등생의 소리를 숨죽여 듣던 승객들은

내가 불어로 물을 주문하는 것에 성공하자

함께 기뻐하며 한 마디씩 거들기 시작했다.

차가운 도시인을 연상케 했던 파리지앵들은

오간데 없고 이토록 친절한 프랑스인들이라니…

뒤늦게 밀려오는 수치스러움은 오직 나의 몫일뿐.

열혈 아저씨는 붉게 물든 나의 얼굴을 외면한 채 주변 승객들에게 매우 훌륭한 학생이라며

거듭 칭찬했고

다른 승객들은 뭔가 필수 생존 불어를 더 가르치도록 부추기기 시작했다.

‘아,, 프랑스에 이민 가는 것도 아닌데 생존 불어가 그렇게나 많이 필요하단 말인가 ‘

그렇게 나는 컵라면 대신 물 한 컵을 원샷한 뒤 프랑스에 도착할 때까지 강제로 잠에 빠져들었다.

아니, 빠져들어야만 했다.


불행한 꿈(?)은 꼭 이뤄지더라

십여 년 만에 찾아왔다는 파리의 혹한도

나의 ‘파리 앓이’에는 어떤 영향도 주지 못했다.

최근에는 공포스러운 빈대의 습격으로

홍역을 앓고 있지만 

그시절 열흘 남짓한 시간 동안 파리는

남편의 조건부 유무와 상관없이

내가 상상했던 모습 그대로를 보여줬다.

지하철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탑승한 악사의 선율은 후각을 마비시키며 찌든 냄새 대신,

한껏 낭만스런 분위기를 끌어올렸고

어찌 된 영문인지 악명 높은 집시와 소매치기 등은 내게 한번도 접근하지 않았으며

유일하게 나를 긴장시켰던 건,

알록달록한 마카롱과 디저트를 사들고 공원이나 성당 계단 등에 걸터앉아 먹을 때마다

호시탐탐 노리던 비둘기뿐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남편은 해외 여러 나라에

지사가 있는 회사에 다니고 있었는데

그중에는 파리도 포함돼 있었다.

남편 역시 출장 기간 중 만난 파리의 인상이 나쁘지 않았는지 3년 간 머물 수 있는 파리 주재원 발령은 그때부터 막연한 우리 부부의 꿈이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남편의 회사 지인들과 알아갈수록

나는 비극적인 현실에 눈을 뜨게 되었다.

여러 해외 지사 가운데 파리 주재원은 업무능력, 언어능력, 사회생활까지 삼박자를 두루 갖춘 소위 엘리트 등의 전유물이었으며,

불행하게도 나와 비슷한 류의 인간이었던 남편은 아웃사이더 중에 아웃사이더였던 것이다.

더 놀라운 건 남편과 친한 회사 사람 중엔

유독 능력자들이 많았고

그중엔 파리 주재원으로 발령받은 선배도 있었다.

그는 내가 살아오며 만난 사람들 가운데 반짝거린다는 착각이 들 만큼 똑똑한 인물이었는데

남편의 말에 따르면 업무능력과 사회생활은 물론 언어능력이 탁월해 영어 실력은 사내에서도 손꼽히는 수준이고

일본어로 된 책을 취미 삼아 읽으며 결국 불어까지 습득해 파리 주재원 발령을 받았다고 한다.

고의는 아니었겠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후

나의 ‘파리 앓이’는 씻은 듯 완치됐고

지인들이 해외 발령을 받을 때마다 우리 부부는 환송회와 환영회에서 위로와 경험담을 들으며

결혼 11주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난 2022년 가을,

남편은 자신에게 마지막 기회인 것 같다며  

프랑스 파리는 아니지만

베트남 호찌민 지사에 도전해 보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파리 살이에 대한 꿈‘을

 정작 남편은 잊지 못했던 것 같다.

‘이 대신 잇몸처럼’ 먼 옛날 프랑스가 베트남을 식민지화한 적이 있다는 남의 아픈 역사까지 들춰내는 모습을 보며

코로나 시국까지 거치는 동안 해외에서 3년씩이나 버틸 용기는 진즉 사라져 버렸지만

차마 반대할 수 없었다.

미안하지만 한편으로는 ‘설마 되겠어?’라는 생각도 컸다.

그러나 누가 그랬던가,

‘불행한 꿈(?)은 꼭 이뤄진다’고.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남편의 베트남 호찌민 주재원 행이 결정됐고

우리는 석 달 안에 준비를 마치고 머나먼 남쪽으로 3년 살이 길을 떠나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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