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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키운 아이 Nov 26. 2023

‘흰뺨기러기’의 생존전략 _ 1부

국경을 넘나드는 기러기들은 언어가 통할까?

사자보다 기러기

몸길이 60~70cm, 몸무게 1.21 ~ 2.23kg.

전체적으로 은회색이며 등과 날개 바깥면은

흰색과 검은색 깃털이 섞여있다.

얼굴 옆 면에 넓은 흰색 무늬를 따서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흰뺨기러기’의 이야기다.

기러기목 가운데 ‘흰뺨기러기’가 유명한 이유는 따로 있다.

천적을 피해 절벽에 둥지를 짓고

집단을 이뤄 생활하는데 정작 새끼들이

어미가 있는 바다로 향하기 위해서는

수백 미터가 넘는 아찔한 절벽에서 목숨을 걸고 뛰어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뛰어내린다는 표현도 부족하다.

그야말로 추락하는 것들에겐 날개가 다.

자연 다큐멘터리를 보면 과히

삼천궁녀도 겁을 먹고 돌아설 만한 높이에서

보송보송한 털 한뭉치가 뛰어내리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바로 ‘흰뺨기러기 새끼’ 의 첫비행이다.

아무래도 사자가 새끼를 강하게 키우기 위해 절벽에서 물어 떨어뜨린다는 말은 거짓말 같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아프리카 세렝게티 초원에 그토록 아찔하게 솟은 절벽이 어디 있단 말인가.

알고 보면 새끼를 가장 강하게 키우는 것은

정작 ‘흰뺨기러기’가 아닐까?

그리고 내 아이를 ’흰뺨기러기 새끼‘처럼 높디높은 언어 장벽 너머로 등 떠밀게 될 줄 누가 알았으랴.


완벽한 영어 교과서의 비밀 

늦은 오후, 낯선 번호로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한 아이의 오랜 비밀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뜻밖에도 학교 담임선생님의 전화였다.

상담 기간도 아닌데 걸려온 전화에 덜컥 겁을 먹은 나에게 선생님은 조심스럽게 운을 떼셨다.

“저기… 사교육을 조장하는 것 같아서 정말 조심스럽습니다만,

 방과 후 영어선생님이

어머님과 상담하기를 요청하셔서요. “

담임선생님도 일 년에 한 번

상담기간에 뵐까 말까 한데 방과 후 선생님이 왜 나와 면담을 요청하신단 말인가.

그리고 들려온 충격적인 이야기.


아이를 학교에 보낼 무렵 바쁜 엄마였던 나는 최대한 다양한 경험을 학원이 아닌,

학교에서 온전히 누렸으면 하는 바람으로

학비가 비싸더라도 사립 초등학교를 보내기로 결심했다.

당장 1학년 하교 시간만 해도

국공립학교는 12시 반이었던 반면,

사립학교는 무려 오후 2시 반이었기 때문에

변명 같지만 워킹맘에게는 사립학교가

더 매력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코로나 시국이 한창이었던 입학 당시, 추첨제로 뽑는 사립초등학교 입학 경쟁률은 그야말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엄마들 사이에서 국공립학교 보다

상대적으로 재택수업이 적고 수업 내용 역시 교육방송을 틀어주는 것이 아니라

학교 자체에서 교육 자료를 만들어 진행한다는 입소문이 퍼졌기 때문이었다.

사실 소문까지는 미처 고려하지 못했지만

13대 1까지 경쟁률이 심각해지는 상황을 지켜보며 뒤늦게 이러한 사정을 알게 됐다.

평균 경쟁률이 3대 1 정도였던 것을 감안하면 당시 열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찌나 가슴을 졸였는지 일하다

잠시 화장실에서 실시간 추첨영상을 보며

우리 아이의 추첨번호가 불려졌을 때

나도 모르게 ‘만세!'를 외치고 말았다.

다행스럽게도 우리 아이가 가게 된 학교는 사립학교 중에서도 교육열이 조금은 덜하다는 평가를 받는 곳이었기에 더 안심했던 것 같다.

2학년 때부터는 일주일에 두 번 방과 후 영어수업도 진행했는데

이따금 영어 교재를 볼 때마다 빼곡하게 채워진 알파벳을 보며 사립학교를 보낸 나의 선택에

또 한 번 갈채를 보내기도 했다.

세 살부터 직장 어린이집에 다니며

아빠와 함께 출퇴근을 했던 아이에게

학교를 가기 전까지 가장 큰 시련은 일곱 살에도 아직 한글을 깨치지 못한 모습에 분노한 외할머니의 한 달간 스파르타 한글 교육이 전부.

매일 우리 집으로 출근하다시피 한 외할머니의 지휘 아래 알파벳도 그 무렵 혹독하게 뗐다.

그랬던 아이가 학교에 이토록 잘 적응할 줄이야.


그러나 ‘완벽했던 영어 교재’는 전부 가짜였다.

나름 시사프로그램만 십여 년 넘게 해오며

온갖 사기 사건을 방송했던 나는

아홉 살짜리 꼬마에게 완전히 속았다.

녀석은 생애 두 번째 만난 ‘영어’라는 시련을 이겨내지 못했으며 이른바

‘영포자(영어를 포기한 자)‘의 길을

홀로 걷고 있었다.

2학년 내내 영어 수업 시간에 낙서만 하며 딴짓을 하는 아이를 지켜보던 방과 후 선생님은

3학년 때에도 비슷한 상황이 이어지자

더는 두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하셨던 것 같다.

완벽했던 영어 교재의 비밀은

바로 친구들에게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교우 관계는 문제가 없었는지 영유(영어유치원)출신 고학력 도우미들이 나서서 빈칸을 채워줬고

우리 부부는 다른 아이의 영어 실력을 보며 흡족해하고 또 감탄했던 것이다.

‘아, 아홉 살 님아! 어찌 그 고독한 길을

2년간 홀로 걷고 있었는가.‘

화가 나기보다는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사실 우리 부부는 아이를 낳고 학창 시절 학원을 거의 안 다녔다는 공통점을 발견했는데

때문에 학교 수업만 잘 들어도 충분히 따라갈 수 있을 거라는 무책임한 믿음이 있었던 것 같다.

학교에 입학하기 전에도 저녁 7시까지 아이를 돌봐주는 직장어린이집 대신, 오후 4시에 끝나는 영어유치원은 애초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또 그때 놀지 않으면

평생 언제 마음껏 놀아본단 말인가.

그렇게 나의 아이는 사교육이라고는 본인이 원했던 예체능 학원이 전부였고 공부라고 부를만한

학원 문턱은 밟아보지도 못한 아이가 되었다.

하지만 사립초등학교에는 영어유치원을 졸업한 친구들도 많이 있었기 때문에

나름 완벽주의자 성향이었던 아이는 친구들에게 미숙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듯하다.

결국 아홉살 아이가 홀로 간직하게 된 비밀.

글로벌 시대에 벌써부터 영포자(영어를 포기한 자)의 길을 걷는 제자를 지켜보기도 안타깝고

그렇다고 ‘이 미련한 엄마야 제발 영어 학원 좀 보내라 ‘라고 말씀하실 수 없으니

사교육을 부추기는 것 같아 너무 조심스럽다며 운을 뗀 담임선생님의 심정도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결국 아빠의 해외 지사 발령 소식을 계획보다 조금 앞당겨 선생님께 털어놓기로 했다.

그것은 3년 간 해외 국제학교를 다니며

아홉 살 영포자도 어쩔 수 없이 영어를 써야만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나의 학창 시절과

아이의 학창 시절을 모두 합해 돌이켜봐도

선생님께서 그렇게 기뻐하시는 모습은

처음 본 것 같다.

남편의 발령을 나보다 더 기뻐하며 정말 너무 다행이라는 말씀만 반복하던 선생님은

이러다 아이가 영어 공부를 영영 포기하게 될까 봐 걱정됐다는 말씀도 조심스럽게 전하셨다.

그날 밤, 아이와 깊은 대화를 나눈 우리는

다시 한번 눈과 입술떨리도록

충격적인 사실에 직면해야 했다.

그렇다. 2년이란 시간은

무언가를 잊기에 충분했으며

녀석은 알파벳도 일부 이미 까먹은 상태였다.


맙.소.사.

자, 영어 절벽이다!

살려면 뛰어내리거라, 흰뺨기러기 꼬마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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