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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야 Feb 27. 2024

다시 시작하는 연극의 시대

[연극] 집에 사는 몬스터 : 극작 - 데이비드 그레이그, 연출 - 김정

집에 사는 몬스터 (2023)


제4의 벽이라고 불리는 연극의 기본을 생각한다. 무대 위의 배우는 관람하는 관객들의 시선을 무시해야 한다. 그들이 벽에 가려진 것처럼 배우는 관객의 어떠한 행동을 무시하고 연극을 이어간다. 무대는 완벽하게 제외된 창작의 공간이다. 그렇게 완성된 연극은 현대연극의 기본형식으로 유지해 온다. 과거에 셰익스피어의 원형극장에서 진행한 연극을 떠올리면 그때와는 다른 형태의 새로운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현대의 연극은 형식에 절차에 따라 서사만을 바꾼 채 관객에게 연극을 선사한다. 하지만 이러한 구조도 시대가 지날수록 호응이 떨어졌다. 특히 영화, 드라마 같은 TV 같은 스크린 시대가 오면서 연극을 낡은 예술로 잊힌다. 

  

연극은 이대로 사라지는 예술이 될 것인가? 이런 연극의 구조와 패턴에 관객은 더 이상 무대를 찾아오지 않을 것인가? 에 대한 극작가와 연출가의 고민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연극의 기본 구조는 혁신이 필요하다. 동시에 연극을 보러 와주는 관객을 끌어들이는 방식을 고민했다. 그리고 많은 관계자들은 그에 대한 결과로 연극 ‘집에 사는 몬스터’를 대중에게 선사한다. 다만 이번 연극이 현대의 형태를 뒤집은 혁명적인 작품은 아니다. 오히려 기본적인 구조에서 그저 새로운 장치, 과감한 스타일로 연극의 매력을 감소시켰다고 말하는 관객 또한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젊은 극작가의 노력과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는 이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연극의 형태를 새롭게 개편하려는 태도에 인상을 느꼈다.  


만약 내가 연극이 만약 연출적인 특징과 장치 무대로만 보여준다면 식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연극 ‘집에 사는 몬스터’는 나의 걱정을 덜해주었다. 극본에서 보여준 연극의 새로운 형태에 발맞춰 움직이는 스타일은 꽤나 특이했다. 기존의 연극처럼 대사로만 이루어진 방식에서 조금 벗어난다. 마치 무대 위에 바라보던 관객을 바라보던 시점에서 무대 위에 참여하는 관계자로 끌어당긴다. 그러나 메타적 극본과 연출은 과거에도 있었다. 오스트리아의 극작가 페터 한트케의 연극 ‘관객모독’은 기존의 연극에서 바라보던 이들에게 새로운 형태의 연극을 참여하게 만든다. 욕설과 분노 관객을 모독하며 무대 위는 난장판이 된다. 연극을 보던 관객은 매우 분노하게 만든다. 그래서  배우에게 관객은 무대를 인수받는다. 


연극 '관객모독'은 배우들의 표면적인 구조를 수동적으로 듣던 청자에게 마주하는 화자로 변신시킨다. 그렇지만 어렵다. 그래서 관객이 화자가 되겠지만 연극을 심취하기에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관객은 쉽게 접근하기 어렵다는 특성과 이미 과거의 고전처럼 받아들여지는 형식으로 생각하는 태도는 더 이상 새로운 연극을 받아들이는 화자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해졌다. 그들은 타자의 시선으로 연극을 겪은 경험을 얻는 것뿐이다. 그 점에서 연극 ‘집에 사는 몬스터’는 좀 더 쉽고, 단순하며, 재밌다. 물론 청소년 덕의 입장을 다룬 이야기이게 성장과 현대의 관점, 사회적인 비판을 써낸다. 그래서 관객의 일상적인 눈높이에 맞춘 서사로 전환된다. 하지만 그런 점은 관객이 연극에 간접참여로만 연극을 관람하는 한계가 있을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다른 연극과 다를 게 무엇이 있나 싶다. 그러나 연극 ‘집에 사는 몬스터는’ 기발했다. 바로 주인공 덕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다루는 않기 위해 무대를 새롭게 개편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벽을 보고 연극을 관람하는 관람석을 배제시킨다. 4면에서 배우들과 함께 참여하도록 좌석은 배치되었고, 무대의 장치는 움직인다. 동시에 배우들이 무대 밖에서 나타나서 관객에게 상황을 설명한다. 혹은 관객석에 난입하여 그들에게 이야기에 동참할 것을 요구한다. 그렇게 관객은 무대 위의 주인공 덕의 세계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써 내려간 소설을 듣는 참여자가 되었다. 우리는 연극을 보는 관객이자, 소설을 읽는 독자였다. 이야기의 속 이야기로 초대되는 연극의 구조는 낯설고, 생소하지는 않다. 그러나 현대극의 무대의 배치를 통해 관객은 체호프의 완성된 무대에서 탈피를 체험한다. 


매번 체호프의 연극에서 진행해 온 비극과 서사의 평면도를 벗어난다. 입체적인 구조로 태어나 현대적인 연극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 다만 지금 새롭게 연출하고 기획되는 연극이 재 탄생이라고 할 수 없다. 여전히 부족하고, 여전히 진부한 점을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연극은 끊임없는 시도를 통해 무대 위에서 대중에게 호응을 요청한다. 제4의 벽을 넘어서던, 넘어서지 않던 매번 예술로서의 사명을 품고 말이다. 그래서일까 연극의 시대가 끝나지 않고 다수의 대중은 연극을 잊지 않는다. 각자 다른 이유를 가지고 있겠지만 연극은 지속될 것이다. 새로운 시대에 발맞춰 기존의 낡은 형태를 고수하면서도 그들은 한층 더 많은 진보를 꿈꿀지도 모른다. 그렇게 얻어낸 결과를 통해 그들은 다시 연극의 시대를 열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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